Girls Don’t Cry #1

누가 레이싱 모델과 링 걸을 모함했나.

레이싱 모델이나 링 걸이 되려면 어떤 기준을 통과해야 할까? 정해진 건 없다. 하지만 격투기장과 레이싱 기장에 선 그들은 모두 20~30대이고, 어떤 기준에서 ‘예쁜’ 여자들만 있다. 섹시함을 한껏 강조한 유니폼과 보디라인을 돋보이게 하는 포즈의 여성들. 카메라는 언제나 집요하리만치 이 여자들을 좇는다. 미투 운동이 확산되고 성 상품화와 인권 문제가 대두되며, 세계적 레이싱 대회 F-1도 그리드 걸(레이싱 모델)을 기용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아마도 당사자의 의견을 묻지않고 내린 결론일 것이다. 그렇다면 한국의 레이싱 모델, 링 걸들이 직면할 미래는 어떨까? 몇몇 국내 모터쇼는 “ ‘고급스러워 보이기 위해’ 레이싱 모델 대신 패션모델을 기용한다”고 선언한 지금, 한국의 레이싱 모델과 링 걸은 어떤 입장일까? <플레이보이>는 그들의 ‘몸’ 대신 진솔하고 담백한 언어에 귀울이기로 했다. 그리고 어떤 기준도 두지 않기 위해 사진에 색(色)을 넣지 않기로 했다. 카메라 앞이라면 대체로 ‘여성의 미’를 강조하기 위해 애써 가슴과 엉덩이를 내밀어야 했던 그들에게 몸의 힘을 빼달라고 제안했다. 그렇게 우리는 레이싱 모델, 링 걸의 ‘민낯’을 마주했다. 자연스럽다, 아름답다. 이건 평가가 아니다. 공명이고 공감이다. 마지막으로 묻는다. 누가 이들을 모함했나?

Girls Don't Cry #1
톱과 재킷은 모두 & OTHER STORIES, 스커트는 DAEJOONGSO, 부츠는 스타일리스트 소장품, 나뭇결이 살아 있는 빈티지한 타일은 YOUNHYUN 제품

박하 | 레이싱 모델, aj타이어베이 레이싱팀
드라마 주인공 이름에서 따왔어요. 꿋꿋하게 열심히 사는 모습이 참 예뻐 보였거든요. ‘박하’라는 이름만 들어도 시원시원한 느낌. 이름처럼 제 인생도 시원시원했으면 좋겠어요. 2014년에 데뷔했으니까 햇수로는 5년이 됐네요. 친구들의 권유로 레이싱 모델 일을 시작하게 됐어요. 지금은 AJ타이어베이 소속이고요. 대회가 열리면 서킷장으로 출근해요. 서울에서 제일 가까운 곳이 용인이고 영암, 인제에도 있어요. 소속팀을 홍보하고 레이서를 서포트하는 일을 하죠. 레이서가 좋은 성적을 낼 수 있도록 하는 일들이 주된 업무예요. 대부분의 사람은 모르지만, 서킷 열기가 정말 대단하거든요. 햇볕도 강렬해요. 그래서 모델들이 레이서의 눈을 보호하기 위해 우산을 들고 있는 거예요. 그 우산도 오래 들고 있으면 엄청 무겁게 느껴져요. 차 옆에서 예쁜 척하고 쉽게 돈 번다고 생각하는데, 쉬운 일이 절대 아니에요. 레이서의 컨디션을 체크하면서 차가 돋보일 수 있도록 포즈를 취하는 것도 어렵죠. 인식과 달리 일하면서 만난 모델들은 굉장히 성실한 분이 많았어요. 놀랄 만큼요. 그 모습을 보면서 ‘아, 내가 사명감을 가지고 일할 수 있겠구나’ 싶었죠. 주다하 씨가 롤모델이에요. 데뷔했을 때 자주 보던 모델 선배이기도 했고요. 생전에 후배들도 잘 챙겨주는 밝은 사람이었어요. 올해는 운동도 열심히 해볼까 해요.

 

Girls Don't Cry #1
셔츠는 DAEJOONSO, 팬츠는 TOMOROWW LAND, 슬리퍼는 BOHEMIA DESIGN 제품

맹나현 | 링걸, One Championship
VIP보다 경기장 가까이에서 경기를 볼 수 있어요. 스포츠를 좋아하거든요. 경기장의 박진감이 특히 좋아요. 링 걸은 피켓만 들고 예쁜 척하는 게 아니에요. 어떤 선수가 출전하는지 체크하고 경기 중 선수가 부상을 당해 치료받을 때면 링 위에 올라가 분위기를 정리해야 할 때도 있어요. 늘 긴장하고 있어야 해요. 그래서 재미있는 것 같아요. 격투기의 인기는 한국보다 다른 아시아 지역이 더 뜨거워요. 상하이, 베이징에서도 대회가 많이 열리죠. 작년 겨울에는 태국 <플레이보이> 촬영을 했어요. 촬영장 분위기도 결과물도 마음에 들어요. 매거진 커버는 처음이라 드디어 자랑할 일이 생겼구나 싶었죠.(웃음) F-1 대회의 그리드 걸 퇴출 소식, 들었어요. 점점 레이싱 모델과 링 걸이 설 자리가 없어지고 있는 거죠. 인터넷 게시물처럼 간접적인 경험이 문제가 되는 것 같아요. 실제로 대회나 쇼를 보러 온 관람객은 모두 멋있다고 하거든요. 선정적인 의상이 문제라면, 의상을 개선하는 것도 방법이라고 생각해요. 결국 이미지를 소비하는 것인데, 여자건 남자건 똑같지 않나요? 사회적 분위기 때문에 모델과 링 걸을 퇴출한다는 건 이해하기 어려워요. 피해자가 아니라 가해자들, 문제를 일으킨 사람들이 문제시되어야 하잖아요. 최근 요리에 재미를 붙였어요. 요리라기보다는 플레이팅 수준에 가깝지만.(웃음)

 

Girls Don't Cry #1
미니 드레스와 슈즈는 모두 스타일리스트 소장품

김세라 | 링 걸, TFC
학비랑 생활비를 벌기 위해 모델 일을 시작했어요. 중학생 때였던 걸로 기억해요. 그때는 ‘얼짱’이 인기 있을 때라 안 나가본 선발 대회가 없을 정도였죠. 오히려 성인이 되었을 때 친언니가 레이싱 모델을 해보라고 했어요. 의외죠? 언니의 권유로 시작했는데, 정말 재밌는 거예요. ‘천직이다’ 싶을 정도로. TFC 걸은 2016년부터 했어요. 피켓을 들고 링 위에 오르죠. 상상만큼 무대 중앙에서 포즈를 취하거나 워킹을 하는 경우는 많지 않아요. 케이지 바깥쪽에 난간이 있거든요. 넓지도 좁지도 않은. 거기가 곧 링 걸의 무대예요. 전선이랑 물병 그리고 땀에 젖은 수건들이 뒤엉켜 있죠. 아직도 잊지 못하는데, 첫 리허설 중 넘어질 뻔했어요. 계단도 깜깜한 데다 미끄러웠거든요. 아무도 이 사실을 얘기해주지 않았어요. 그 이후로 ‘예뻐 보이는 것만큼 중요한 것이 안전이다’라는 나름의 철학이 생겼죠. 그래도 경기장 곳곳에서 제 이름이 적힌 플래카드를 보면 기분이 좋아요. 지방에서 1박 2일 스케줄로 온 팬도 많거든요. 아무래도 신체에 대한 평가에서 자유롭진 못해요. 캐스팅 때문에 미팅을 가도 그 시선과 말들이… 스트레스죠. 2018년에는 ‘김세라’라는 이름을 더 알리고 싶어요. 레이디 가가가 롤모델이에요. 개성도 강하고 항상 밝은 에너지를 주는 사람. 그런 사람이 되고 싶어요.

 

재킷은 HELMUT LANG, 티셔츠와 슈즈는 모두 TOP SHOP, 팬츠는 ZARA 제품

윤희성 | 레이싱 모델, 준피티드 레이싱팀
2년 됐어요. 처음 레이싱 모델 일을 할 땐 마냥 신기하고 재밌었죠. 지금도 일할 땐 자부심을 느껴요. 레이싱 모델의 역할은 팀의 사기를 충전하는 것과 홍보예요. 레이싱 모델을 보는 부정적인 시선도 있어요. “레이싱 모델이 여성을 성적 대상화하는 최전선에 있다.” 이 말에 동의하는 부분도 있어요. 어쨌든 20~30대 젊은 여성만 할 수 있는 일이니까요. 하지만 남성들이 좋아할 만한 섹시한 여자들이라고 해서 무조건 성적 대상으로만 보는 건 동의할 수 없어요. 이런 걸 문제시할 거라면, 남자 모델을 기용하거나 레이싱 모델들이 모터스포츠와 관련해 전문성을 띠도록 트레이닝하면 더 좋을 텐데, 아쉽죠. 레이싱 모델이 열심히 한다는 말을 모델이 자신을 기용한 갑(甲)에게 이성적인 어필을 얼마나 열심히 하느냐로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어요. 남자 고용자들 중엔 본인의 이성 취향에 맞게, 물건 고르듯 레이싱 모델을 기용하는 사람도 있고요. 이게 레이싱 모델들이 겪는 성차별인 것 같아요. 저는 미투 운동을 적극 지지해요. 피해자들은 단순히 자신이 겪은 파렴치한 사건을 토로한 뒤 끝내고 싶은 게 아니라, 많은 사람과 연대해 또 다른 피해자가 생기지 않도록 하는 거거든요. 더 좋은 사회가 됐으면 좋겠어요. 제 목표는 이 일을 무탈하게 하는 거예요. 나중에 돌아볼 때 보람될 수 있도록.

Credit

  • 에디터 김민지, 양보연
  • 포토그래퍼 김지양
  • 헤어 이영재, 이지은
  • 메이크업 박슬기, 이지은
  • 스타일리스트 김경민
닥터플레이보이 7월 2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