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칼렛 요한슨

그녀는 할리우드와 트럼프 대통령에게 일침을 놓았다.

소피아 코폴라 감독의 2003년 작 <사랑도 통역이 되나요>는 도쿄에서 서로를 찾아 헤매는 두 명의 방황하는 영혼들의 이야기를 그린다. 스칼렛 요한슨은 거의 비칠 듯한 핑크빛 속옷을 입은 채 침대에 누워 커튼이 드리워진 창문을 바라보고 있다. 스칼렛 요한슨은 이 영화에서 대학을 막 졸업하고 호화로운 일본의 한 호텔에서 비극을 한탄하는 샬롯 역을 연기했다. 당시 그녀의 나이는 17살이었다. 그녀의 조용하고 신중한 연기는 할리우드에서 가장 러브콜을 많이 받는 배우 중 한 명으로 자리 잡게 해 주었다. <사랑도 통역이 되나요>가 개봉한 지 14년, 그녀는 우디 앨런에서 코엔 형제에 이르기까지 많은 거장의 뮤즈가 돼왔으며, <캡틴 아메리카>에서 <어벤저스>에 이르기까지 대형 블록버스터에도 모습을 드러냈다. 그녀가 작품을 고르는 기준은 블록버스터에서 실험적인 예술 영화까지 다양하다. 스파이크 존스 감독의 <Her>에서는 컴퓨터의 OS 역할을 맡아 거칠면서도 빛나는 목소리만으로 컴퓨터 캐릭터에 생명을 불어넣었고  <진주목걸이를 한 소녀>에서는 17세기 화가 요하네스 베르미어의 하녀 역할을, 그리고 <돈 존>에서는 포르노 중독자의 여자친구 역할도 소화해 냈다.

할리우드는 성적 매력이 넘치는 배우들과 언제나 끈끈한 관계를 맺어 왔고, 스칼렛 요한슨(Scarlett Johansson)은 종종 마릴린 먼로와 비교되곤 했다. 물론 그녀의 몸매는 압도적이다. 하지만 요한슨은 사람들이 자신의 몸에 대해 떠드는 걸 지겹다고 생각한다. 게다가 마릴린 먼로는 성적 매력을 스스로 제어할 수 없었던 반면, 요한슨의 경우 독보적인 침착함과 냉정함으로 캐릭터를 표현해내는 능력이 있다. 그녀가 가장 최근에 맡았던 역할은 마모루 오시이의 1995년 작품 <공각기동대>의 주인공 모토코 쿠사나기 소령 역이다. 오시이의 오리지널 버전에서 소령은 일본 사람이다. 그래서 요한슨이 캐스팅되었다는 사실이 발표되었을 때 비평가들은 백인이 이를 맡은 데 대해 쓴소리를 한 바 있다. 하지만 브롱크스 출신 유대인인 어머니와 덴마크 출신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난 요한슨은 오히려 할리우드 특유의 인종차별 문제에 대해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게다가 루퍼트 샌더스가 뉴질랜드와 홍콩을 넘나들며 촬영을 진행한 점도, 캐스팅에 대한 많은 의문을 해결해주었다.

스칼렛 요한슨이 인터뷰를 맡은 사람은 < The New Yorker’s>의 아만다 페트루치히다. 그들의 첫 번째 인터뷰가 있고 나서 2주 뒤, 요한슨은 워싱턴에서 있었던 여성 시위에 대해 언급하며 출산과 관련된 권리를 강하게 지지한다고 말했다. 그 와중에 그녀는 새 대통령을 직접 언급하면서 “아마 내 딸은 대통령의 딸인 이방카 트럼프처럼 미래를 선택할 권리를 누리지 못할지도 모른다”라고 얘기했다. 새해가 시작되고 며칠이 지난 바람 부는 오후, 요한슨과 페트루치히는 지나칠 정도로 푹신한 소파에서 초콜릿 쿠키 한 접시를 앞에 두고 어린 시절과 커리어, 그리고 엄마로서의 새로운 삶에 관한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녀는 현재 프랑스의 광고회사 이사인 로메인 도리악과의 사이에서 태어난 2살 짜리 딸의 엄마다(두 사람은 라이언 레이놀즈와의 결혼 생활을 접은 지 3년만인 지난 2014년 결혼식을 올렸다) 페트루치히는 그녀에 대해 이렇게 평했다. “굉장히 솔직하고 재밌으며 직설적인 사람이다. 약간은 뉴욕 여자답게 터프하게 말할 때도 있었다. 그녀는 쓰레기 같은 얘기엔 전혀 관심이 없었다. 그녀와 이야기를 하다 보면, 어지간히 센 주제를 준비하지 않았다간 금세 대화에 흥미를 잃어버릴 것만 같은 느낌을 받았다. 그쯤 되면 소피아 코폴라 감독이 <사랑도 통역이 되나요>에서 안나 파리스가 연기한 쾌활한 금발의 신인 배우의 상대역으로 왜 그녀를 캐스팅했는지가 이해된다. 그녀는 심성이 깊고 사색적인 사람이다. 그 눈빛은 상대를 빨아들일 듯하지만 동시에 거기 버티고 있으라고 명령하는 듯하다.

당신이 태어나고 자란 , 뉴욕은 어떤 곳인가?
그 당시 뉴욕은 지금과 달랐다. 이렇게 얘기하니 굉장히 늙어버린 느낌이긴 하지만, 어쨌건 훨씬 더 자유로운 곳이었다. 그 무렵 친구들은 훨씬 다양했다. 모두가 사회적, 경제적인 배경이 달랐다. 누군가의 부모님은 마약상이었고, 누군가는 증권가에서 일했지만 모두가 하나의 커뮤니티를 이루고 조화롭게 살았다. 물론 여전히 세상에서 가장 엄청난 도시지만, 그 당시에는 더 많은 사람에게 더 많은 기회가 있던 곳이었다.
오래전 뉴욕 웨스트 빌리지에 한 가죽 가게가 있었다. 마치 영원히 그곳에 있을 것만 같았는데 불과 몇 달 전에도 그곳에 갔었는데, 1967년부터 거기서 샌들을 만들고 있던 주인과 건물주가 싸우고 있었다. 한때는 뉴욕도 집세가 비교적 안정적이었지만, 이젠 그렇지 않은 거다. 아마도 몇 년 내로 그곳은 대기업이 운영하는 장소로 바뀌어 있을 거다. 슬픈 일이다. 바로 그런 가죽 가게가 뉴욕의 심장을 뛰게 하는 것인데 말이다.

뉴요커의 매력이라면, 다들 예술가에게 둘러싸여 살아가면서도 각자의 삶의 방식이 있고 다른 시각을 지니고 있다는 점이다.
이곳에서는 내가 오롯이 나일 수 있다. 내가 원하는 나의 모습으로 살 수 있다. 다른 곳에서라면 쉽지 않은 일일 것이다. 딸을 이곳에서 키울 수 있어서 좋다. 그냥 놀이터에 나가 놀기만 해도 다른 곳에서 자라는 또래들보다 훨씬 더 많은 일을 해 볼 수 있을 테니 말이다.

2015년에 딸을 가졌었던가?
2014년이다(웃음). 딸은 이제 막 2살 반이 됐다.

모성이 자신을 변화시킨다고 생각하나?
당연히 변했다. 임신하고 아이를 세상에서 만나는 모든 과정이 심오했다. 영유아와 함께 사는 것은 본능적으로 하고 싶은 일만 하겠다는 생각을 버려야만 가능하다. 물론 엄마로서 아이를 위한 결정을 내려야 하지만 한편으로는 이런 상황 앞에 항복해야 한다는 것이 자유롭게 느껴질 때가 있다. 단연코 지금까지 겪어 본 모든 일 중의 최고다. 누군가 나에게 마치 또 하나의 마음이 자라나는 듯한 기분이라고 했다. 엄청나게 정확한 얘기다. 사랑할 수 있는 역량이 더 깊어지는 느낌이다. 예전엔 아이로 인해 내 삶이 변해버릴까 봐 걱정했었다. 실제로 완전히 변하긴 했지만 오히려 예전보다 더 나다워졌다.

지금까지 육아를 하면서 어려운 일을 겪은 적이 있나?
<공각기동대> 촬영할 때 딸과 6개월 동안 뉴질랜드에서 지낸 적이 있다. 너무 힘들었다. 집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것도 그렇지만 일의 무게를 견딜 수 없었다. 하루종일 사람들과 싸웠고 나 자신과도 싸웠다. 극중 역할과도 전쟁을 벌여야 했다. 루퍼트 샌더스 감독에게 여러 번 이런 얘기를 하기도 했다. “대체 이 캐릭터에게는 좋은 일은 안 생기나요? 단 한 번의 끝내주는 일도?” 대답은 “노”였다. 한 가지 스포일링을 하자면 이 영화는 주인공에게 아주 안 좋은 얘기만 계속 이어진다.

소령 역으로 캐스팅됐을 여러 얘기가 많았다. 당연히 일본 여자일 거로 생각했으니까. 이런 비평에 기분이 상하진 않았나?
왜 안 그랬겠나? 나는 할리우드가 다양성에 관해 얘기해야만 한다고 생각한다. 내가 맡은 캐릭터는 로봇 몸체에 사람의 뇌를 집어넣어 만든 창조물이다. 어디에도 속하지 못하는 주인공은 영화 내내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 나선다. 그 과정에서 나를 캐스팅한 이유도 찾을 수 있길 바랄 뿐이다. 영화를 보면 알겠지만, 그 안에서 나는 누구이고, 진정한 정체성은 무엇인가에 대한 대답이 분명 존재한다. 내가 맡은 캐릭터의 외모가 어떠한지,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보든 말이다. 

연기할 다른 인격 안으로 몰입하게 되면 주변 사람들과 트러블이 있을 같다.
당연히 그렇다. 때로는 지금의 내가 누군지 모를 정도다. 하지만 이 직업의 매력이기도 하다. 자신에 대해 점점 더 궁금해지고 탐험하게 된다. 한때는 도저히 부끄러워서 생각도 못 해본 그런 모습이다. 그런 것을 해방하는 자유를 알게 되면, 더 많은 감정을 표현할 수 있게 된다.

가족에 관한 얘기를 해보자. 아버지는 덴마크, 어머니는 뉴욕 출신이다. 어떤 부모님이셨나?
부모님은 두 아이를 낳고 셋째를 가지려다 두 명의 아이를 더 갖게 됐다. 두 명은 나와 쌍둥이 오빠다. 둘째, 셋째 아이는 오히려 첫째 때보다 더 느슨하게, 걱정도 덜 하며 키우기 마련이다. 그런 점에서 나와 오빠는 이득을 본 점도 있고 그렇지 않은 점도 있다. 어머니는 캘리포니아로 이사를 가서 살았고, 덕분에 아버지가 집에 있으면서 우리의 양육을 책임져야 했다. 두 분은 늘 경제적인 문제로 다투셨는데, 아버지에게 큰 짐이었다. 13살 무렵부터 우리는 거의 스스로 자랐다. 여전히 집에서 학교에 다녔고 일도 했다. 뉴욕에서 살았으니 나가서 놀기도 많이 했다. 그래서인지 어린 나이에 이런저런 사고를 치고 다녔다. 나는 자제력이 있는 편이지만, 사실상 나를 이끌어 주는 사람이 없었기에 자칫하다간 헤어나올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

당시 했던 일은 어땠나?
나는 꽤 훌륭한 직업의식을 갖고 있었다. 자기보호 본능 같은 게 있다. 졸업할 때까지 일을 해서 18살에 내 보금자리를 만들 수 있었다.

연애는 어땠나? ‘지금 아는 그때도 알았더라면하는 점이 있는지?
그 당시엔 누구와도 데이트하지 않았다. 한 번 소개팅에 나간 적이 있다. 약속 장소에 가보니 상대는 이미 머리끝까지 취해 있는 상태였다. 소개팅 자체가 불가능해 보였다. 얼마나 실망스러웠던지! 다시는 이십 대로 돌아가고 싶지는 않다. 만약 돌아가야 한다면 ‘모든 것은 변하기 마련이고 영원한 것은 없다’라는 것 정도 알았으면 좋겠다.

아버지는 무슨 일을 하셨나?
건축가였다.

어머니는?
어머니는 굉장히 야심 찬 분이셨고 멀티 태스킹에 능하셨다. 무척 강한 에너지를 가진 분이셨다. 아마도 그런 점은 어머니를 닮은 것 같다. 아버지 몽상가에 가까웠다. 창의적인 사람이지만 때로는 자신을 가두기도했다. 그에 반해서 어머니는 언제나 큰 그림을 그리셨고, 나는 그런 점을 더 닮은 것 같다.

자신을 가두었다라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자신감이 없으셨다. 아버지는 할아버지와 복잡한 관계였다. 비록 아버지가 큰 꿈을 꾸고 있었다 하더라도, 한계를 뛰어 넘을만한 자신감을 가지신 적은 없었다. 어머니는 언제나 우리 모두에게 말씀하셨다. 만약 원하는 게 있다면 스스로 얻어내야 한다고. 아무도 대신해주지 않는다고 말이다. 어머니의 그 말씀이 굉장히 뇌리에 깊게 박혀 있다. 나는 어머니보다는 좀 더 너그럽고 협력적인 분위기를 좋아한다. 아마도 프로덕션에서 오래 일하면서 어떻게 서로가 의욕을 가지고 일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봐 왔기 때문이다. 나에게도 분명 야심은 있다. 내가 원하는 것이 저 먼 곳에 있다면, 그걸 향해 달려나갈 거다.

비교적 빠른 나이에 배우가 되었다. 대개 어린 시절 갖고 있던 자신감은 시간이 지나면서 없어지기 마련이다.
맞다. 대부분 고등학교에서 대학교에 진학하고, 졸업할 때쯤엔 좋아했던 전공도 싫어진다. 그렇게 인턴 생활을 하면서도 진정으로 원하는 게 아닌 것 같다는 느낌을 받는다. 실상은 그런 일을 본격적으로 해본 적도 없고 필드에서 시간을 보내지도 않았음에도 말이다. 또 뭔가 다른 것을 위해 대학원을 간다. 원하는 걸 하기 위해서는 박사 학위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니까. 그러다 결혼하고 아이를 가지면 삶은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다. 하지만 어린 나이에 일을 시작하면, 그 분야를 갈고 닦을 시간이 주어진다. 공을 들인다는 게 쓸데없이 들릴 지 모르지만 그게 본질이다. 시간을 들여 갈고 닦다 보면 쓸 데 없는 것이 깎여 나간다. 일찌감치 기름기를 빼면 정말로 나를 움직이게 만드는 게 무엇인지 집중하게 되는 거다.

자기가 원하는 안다는 일종의 축복이다.
맞는 말이다. 그렇지 않다면 무수한 가능성에 질식해서 죽어버릴지도 모른다. 특히 이 나라에서는 모든 것이 가능하지 않나? 우린 그런 식으로 길들어졌다. 때로는 지나치게 많은 것이 가능한 나머지, 오히려 사람들은 혼란에 빠지고 만다. 어떤 것에도 실패하지 않으려고 그 자리에 멈춰 버린다. 어딘가로 더 갈 수 없는 것이다.  

미국인들은 언제나 성공을 가장 높은 곳에 둔다. 실패나 불확실성을 받아들일만한 힘이 없는 것이다.
버락 오바마가 가지고 있던 힘이 바로 그거다. 정말 소중한 자질이다. 특히 그 겸손이야말로 우리가 무언가를 할 때 성공을 가져다 주는 중요한 요소다. 리더가 그런 자질이 없다면 성공하기 어렵다. 겸손을 위한 유약함과 호기심, 연민의 감정을 지니고 있지 않다면 말이다. 그런 자질들 없이는 그 어떤 분야에서도 리더가 될 수 없다고 생각한다. 나는 실수로부터 배우는 힘, 그리고 동료에 대해 연민을 느끼는 것이야말로 리더를 만드는 힘이라고 생각한다.

겸손이야말로 우리가 무언가를 할 때 성공을 가져다 주는 중요한 요소다. 리더가 그런 자질이 없다면 성공하기 어렵다. 겸손을 위한 유약함과 호기심, 연민의 감정을 지니고 있지 않다면 말이다.

당신은 버락 오바마를 위해 번의 캠페인에 등장했고 최근 선거에서는 힐러리 클린턴을 지지했다. 최근에 벌어지고 있는 일들에 대해서는 어떻게 대처하고 있는지?
알다시피 재밌는 상황이다. 선거 직후에, 그러니까 11월에 우디 앨런과 함께 저녁 식사를 한 적이 있다. 우리는 “선거는 삶의 의미에 대해 생각하기 전에 먼저 얘기해야 할 주제인 거지”라며 대화를 시작했다. 그리고 난 이렇게 말했다. “‘내가 그럴 줄 알았어’라고 말하는 사람이 되지 말아줘요.” 그는 이렇게 말했다. “솔직히 난 충격 받았어. 그 사람이 단 한 주에서도 승리하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었거든.” 우디 앨런도 저런 식으로 느꼈다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나는 엄청나게 충격을 받았기 때문이다. 굉장히 기이한 선거 경험이었다. 투표장에 딸을 데리고 가면서 난 이렇게 말했었다. “아가야, 우린 곧 여성 대통령을 갖게 될 거야. 게다가 그게 힐러리 클린턴이란다. 이렇게 쿨한 일이 어딨겠니?” 그리고나서 홍콩으로 가는 16시간짜리 비행기에 몸을 실었고 와인 두 잔을 마시곤 뻗었다. 한 10시간 후에 눈을 뜨니 스튜어디스 선거 결과를 알고 싶은지 물어왔다. 나는 그녀를 바라보며 “클린턴이 됐을 거라는 건 이미 알고 있다고요.”라고 말하자 그녀는 트럼프의 당선 소식을 전해주었다. 그 순간은 정말 드라마의 한 에피소드 같았다.

그녀가 농담하는 알았겠다.
나는 3만 피트 상공을 날고 있었다. 기내는 온통 어두웠고, 잠에 취해 있던 오빠를 흔들어 깨웠다. 그는 오바마 캠프에서 일했었고 굉장히 정치적인 사람이다. “헌터, 일어나 봐. 일어나 봐!” “왜, 뭔데?” “트럼프가 이겼대.” 그러자 오빠는 “안돼, 안돼!”라고 외쳤고, 홍콩 공항에 내렸을 땐 만취 상태가 되어 있었다. 오늘 아침 뉴스를 들을 때도, 그 당시의 충격은 여전히 생생히 느껴졌다.

워싱턴에서 열렸던 시위여성행진‘(The Women’s March)’ 참여했다.
트럼프의 낙태 규제를 완화해야 한다. 우리는 당연한 것을 당연하게 만들기 위한 얘기를 한 것뿐이다. 자궁을 가진 여성이라면 누구나 가질 수 있는 권리이자 자유다. 여성 해방의 시대라더니 아직도 이런 이야기를 하고 있어야 하나? 두 손 두 발 다 들었다.

절망이나 두려움을 다스리기 위해 특별히 하는 것이 있다면?
그저 안주하지 않는 것. 생각보다 어려운 일이다. 많은 사람들이 오랫동안 수동적인 삶을 살아 왔기 때문이다. 지금의 우리에겐 강력한 동기가 없다.

잠시 음악 얘기로 빠지고 싶어진다. 사실 당신은 배우이면서 가수이지 않나. 지난 2008 웨이츠의 곡을 커버한 앨범 <어디건 머리를 있다면 Anywhere I lay My Head> 내기도 했다. 미국에 대한 얘기를 하다 보니, 웨이츠야말로 시대를 대표하는 목소리였다는 생각도 든다. 그의 작품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고 싶다.  
진정한 시인이다. 그는 가장 맛있는 방법을 쓰는 예술가였으며, 언제나 그의 자기 표현은 자아 성찰의 기회를 부여해 주었다. 한 번은 리노 레코드사에서 나에게 앨범을 내자며 찾아왔었다. 그런 기회가 어디 흔한가? 끝내주는 일이었다. 처음엔 약간 클래식한 곡을 하면 어떨까 싶었다. 이를 테면 콜 포터 같은. 그러다가 톰 웨이츠가 베트 미들러와 함께 듀엣으로 부른 ‘I Never Talk to Strangers’를 부르고 싶어졌다. 그러다가 결국 톰 웨이츠의 곡들을 리메이크해 본다면 과연 그 곡들이 나를 어디로 데려갈 지 궁금해졌다. 다른 많은 프로듀서들과 작업을 시도해 봤지만 잘 되지 않았다. 그러다가 운명적으로 데이브 사이텍을 만났다. 그는 이 앨범을 위해 팅커벨 감기약 같은 아이디어를 내 주었고, 우린 그 아이디어를 가지고 달리기 시작했다. 데이브를 만난 건 삶이 바뀔 정도의 행운이었고, 그 이후로도 그는 내 삶에 아주 중요한 존재, 아주 소중한 친구가 되어 주었다. 루이지애나로 녹음을 하러 갔던 일도 아주 어마어마한 경험이었다. 당시 내 첫 남편이었던 사람과 사랑에 빠지게 됐으니까. 정말 로맨틱하고 자유로운 시간이었다. 끝내줬다.

웨이츠의 대부분의 곡들은 번의 공연을 위해 쓰여진 점이 흥미롭다. 마치 아직 살점이 많이 붙어 있는 뼈처럼, 다른 가수들이 이를 재창조하기에도 좋다.
톰 웨이츠가 했던 식으로 다시 작업하려고 하다 보면, 그가 굉장히 고전적인 방법으로 곡에 접근했다는 걸 깨닫게 된다. 물론 악기 파트를 들어 보면 정말 감성적이다. 여기에 깊이를 준 것은 그의 목소리였다.

데이브와 차를 타고 캘리포니아에서 루이지애나까지 갔다.
정말 미친 짓이었다. 서로를 잘 모르는 상태에서였으니까. 그저 로드 트립을 통해서 서로를 더 잘 알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운전은 내가 했다.

그건 굉장히 중요한 부분인데!
데이브를 실버 레이크였나 어디선가 픽업했다. 그는 양손에 담배 일곱 개비와 블랙커피 한 잔을 쥐고, 그 외에도 내가 지금껏 들어보지도 못했던 많은 악기들을 끌고 왔었다. 그걸 전부 트렁크에 넣고선 출발했다. 사막을 달렸고 마리화나도 피우면서 괴상한 짓도 많이 했다. 후드에 앉아서 해가 지는 모습을 보기도 했고.

웨이츠를 위대한 시인이라고 했는데, 딜런이 노벨상을 받았을 때는 어땠나?
물론 그건 멋진 일이었다. 게다가 시상식장에 나타나지 않은 것도 좋았다. 굉장히 딜런스럽지 않은가. 딜런의 음악은 인생의 다른 스테이지에서 찾아 들을 때마다 다른 의미를 전달해 준다. 그는 정말 뛰어난 예술가며 시인이고 신비한 마법사다.

그의 뮤직비디오에 출연한 적도 있다.
친구인 베넷 밀러가 그의 뮤직비디오를 감독했다. 딜런과 함께 등장하고 싶었는데, 그가 비디오에 나오는 걸 원치 않았다. 그래서 우린 각자 알아서 일했다. 그로부터 2년 뒤에서야 딜런을 처음으로 만나볼 수 있었다. 백스테이지에서 만난 그는 내게 “오, 맞아. 그때 비디오 작업해줘서 고마워요.”라고 말했다. 사실 그 말을 비디오 촬영할 때 나타나서 해 주길 바랐지만, 전혀 없었다. 그는 스치듯 기억해 내고 ‘그래, 당신이 내 비디오에 출연해줬었지’라고 말했을 뿐이다. 한 번은 내 친구가 그의 히스테리컬함에 대해서 이런 얘기를 해 준 적이 있다. 그들의 친구인 한 뮤직 프로듀서가 어느 날 “저녁 식사에 친구 한 명 불러올게”라고 하더니, 나타난 사람이 딜런이었다는 거다. 그는 후드 티를 입고 있었는데, 모자를 쓴 채 끈을 잔뜩 조여서 눈이랑 코밖에 안 보였다고 한다. 그리고 그 상태로 저녁 식사를 하는 내내 포크로 찍은 음식을 입에 넣기 위해 후드를 아래쪽으로 계속 잡아 당겨가며 식사를 했다고.

번째 앨범 <브레이크 > 피트 욘과 함께 작업했다. 그는 세르쥬 갱스부르가 브리짓 바르도와 함께 녹음했던 앨범에서 영감을 받았다고 말했는데 듀엣 포맷을 좋아하는 편인가?
듀엣은 훌륭하다고 생각한다. 어릴 때 나는 루이 암스트롱, 엘라 피츠제럴드, 딘 마틴 등이 앤드류 시스터즈 같은 다른 싱어들과 함께 녹음한 곡들을 참 좋아했다. 특히 남자와 여자가 같이 부르는 곡들을 말이다. 피트는 그저 “어이, 앨범 한 번 내 보지 않을래?”라는 말을 툭 던졌을 뿐이었다. 내 생각에 당시 그는 약간 어두운 시기, 혹은 삶의 변화기를 겪고 있지 않았나 싶다. 그렇게 열병을 앓듯 꿈만 꾸다가 불현듯 나에게 문자를 보낸 거고 그래서 작업을 같이하게 된 거다.

앨범은 정말 꿈을 꾸는 듯한 느낌이 있었다. 약간의 통증이 느껴지기도 했고. 당신은 예전의 꿈을 기억하는지?
물론이다.

뭔가 반복적으로 불안한 꿈을 꾸기도 하는지?
난 언제나 불안한 꿈만 꾼다. 한 번은 엄마에게 말했더니 울음을 터뜨리기도 하셨다. 대체로 집에 대해서 꾸는 편이다. 아름답고 오래된 집, 정원이 있고 포도 덩굴들이 자라나는 그런 집. 딱 한 번 살아볼 기회가 있었지만 곧 팔려버리고 말았다. 아마 난방비가 끔찍하게 나왔겠지.

나이를 먹는다는 스스로 모르는 아직 많다는 , 우리 자신에 대해 절대로 완벽히 없다는 것을 깨닫는 과정이라 생각한다. 꿈은 어쩌면 우리 무의식이 만드는 기이하고 드넓은 공간에 닿을 있는 유일한 방법이 아닐까?
동의한다. 무의식으로부터 우릴 차단하는 장애물이 많으니까. 어쩌면 밖에 나가 생활을 하면서 꿨던 꿈을 기억할 수 있는 확률은 희박하지 않을까. 하지만 꿈을 검토해볼 수 있다면 깨어 있는 시간을 더욱 현실적으로 보내는 데 도움이 되지 않을까. 나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좀 더 잘 알 수 있을 테니 말이다.

가끔은 누군가가 당신에 대해 무언가를 드러내 주는 고마운 말을 때도 있지 않나. 물론 그런 말을 들으면꺼져, 네가 나에 대해 안다고.”라는 식으로 반응하기 십상이지만, 집에 돌아와 곰곰이 생각해 보면 들어맞는 그런 때가 있는지?
TED 강연 중 관계에 대한 강연을 듣고 있었는데, 연사가 이런 순간에 대해 얘길 했었다. 어느 날 새로 연애를 시작했는데, 친구들과 가족들이 “약간 빨간불 같은데. 그 사람 너랑 어울리지 않아.”라고 말하는 그런 순간. 어째서 우리는 그런 순간에 우리 자신보다 우리를 더 잘 아는 사람들의 말을 무시하게 되는 걸까? 그 사람들과 거리를 둬 버리기도 한다. 때로는 자신이 자신답지 않은 행동을 할 때 필요한 건 오직 나를 잘 아는 좋은 친구뿐일 텐데도 말이다. 그 사람들이야말로 내 앞에 있는 어떤 것이 내 진정한 모습과 잘 어울리는지 가장 잘 알고 있을 텐데도 말이다. 그냥 “몰라, 그냥 듣고 싶지 않아” 하고 돌아서는 게 더 쉬워서일까?

사랑은 처음엔 법이니까. 잠시 정신 줄을 버리는 걸지도 모르겠다.
그러게나 말이다.

그럴 어떤 말도 들리지 않는다.
평소엔 잘 돌아가는 머리도 그럴 땐 기능을 상실해 버리고 만다. 사랑에 빠지게 만드는 건 뇌의 이성적인 부분이 아니다. 처음 사랑의 감정을 느꼈을 때 작용하는 건 중독을 담당하는 부분이고, 그게 엄청 기분이 좋은 거다.

당신은 예전에 인간은 일부일처제를 위해 만들어진 존재가 아니라는 말을 했었다.
뭐, 얻는 게 있으면 잃는 게 있는 법이니까. 안 그런가? 일부일처제는 사실 잃는 쪽이다. 결혼이라는 아이디어는 참 로맨틱하다. 아름다운 생각이다. 결혼을 실행에 옮기는 것도 아름다운 일이 될 수 있다. 단지 일부일처형 인간이 되는 게 자연스러운 일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이렇게 말하면 곤란해질지도 모르지만, 내 생각에 그건 ‘일’이다. 그것도 힘든 일. 그리고 거의 모든 사람에게 이것이 일로써 인식된다는 건 결혼이 자연스러운 제도는 아니라는 것이다. 물론 결혼을 존중하고 실제로 거기 동참한 일인이지만, 사실 본능 너머의 관점에서 보면 뭔가를 거스르고 있다고 느낀다.  

결혼을 실행에 옮기는 것도 아름다운 일이 될 수 있다. 단지 일부일처형 인간이 되는 게 자연스러운 일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이렇게 말하면 곤란해질지도 모르지만, 내 생각에 그건 ‘일’이다. 그것도 힘든 일. 그리고 거의 모든 사람에게 이것이 일로써 인식된다는 건 결혼이 자연스러운 제도는 아니라는 것이다.

물론 제대로 기능하지 못하는 결혼도 많다.
결혼은 두 사람의 관계와는 관련이 없는 많은 사람들을 포함시키는 일이다. 법적인 계약관계와도 같은 거니까. 그만큼 무게감도 따른다. 결혼을 한다는 건 결혼하지 않는 것과는 매우 다른 일이고, 혹자가 당신에게 결국 똑같다는 얘길 한다면 그건 거짓말이다. 결혼은 많은 것을 변화시킨다. 10년 동안 사귀다가 결국 결혼하게 된 친구들에게, 결혼식 직후에 가서 뭔가 달라졌냐고 묻는다면, 언제나 대답은 예스다. 결혼은 아름다운 책임감이지만, 결국 책임은 책임인 것이다.

지난 2014 번째 결혼을 했는데. 결혼한 다음 뭔가 다른 기분을 느꼈는지?
당연히 그랬다. 뭔가 달랐다. 물론 그 때는 이미 어린 아기가 있었기 때문에 가족의 구성 자체가 다르기도 했었지만. 모르겠다. 뭔지 말로는 설명할 수 없지만 확실히 달라졌다.

전의 결혼과 비교했을 때도?
물론. 아이도 있고, 남편은 다른 나라에서 날아와서 이제 막 이 나라의 시민이 될 참이었으니까. 두 사람 모두에게 이는 큰 변화였다. 물론 그에겐 더했겠지만. 하지만 남편은 뉴욕이라는 곳을 완벽하게 받아들였다고 생각한다. 실제로 어느 밤에 미트볼을 만들었던 걸 보면 말이다. 그때 나는 집에 없었다. 먼 곳에 있었는데, 남편이 사진을 보내면서 “이거 봐, 나 진짜 뉴요커 다 된 듯. <더 소프라노>도 완전 사랑한다고!”라는 문자를 보냈다. 그래서 그냥 “아주 좋아.”라고 답장해줬다.

완전히 뉴욕에 정착한 건가? 아니면 때때로 파리를 오가면서 지내나?
아직은 왔다 갔다 한다. 사실 직업상 여기저기 다니다 보니 내가 어디 살고 있다고 얘기하기도 애매하다. 하지만 여기에서 살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우리 딸이 어떤 장소에 정착을 해야 하니까. 얼마 안 돼서 학교에 들어갈 나이다. 시간은 참 미친 듯이 흘러간다

만약 연기를 했다면 했을 같나?
와, 정말 모르겠다. 아마도 의료 쪽으로 가지 않았을까. 어쨌거나 누군가와 관계를 맺는 직업을 가졌을 것 같다. 나는 사람에게 관심이 많으니까.

완전히 다른 코스긴 한데, 직관적으로 비슷한 부분도 있는 같다.
그중에서도 피부과 쪽이지 않았을까? 사실 피부과 의사가 됐어도 좋았을 것 같다. 꿈의 직업이니까. 친구들이 “나 여기 이상한 게 났어.”라고 하면 “어디 한번 보자!”라고 하는 거지. 한편으론 7년씩이나 학교에 다닐 수 있었을 것 같진 않기도 하다.

리우드가 당신을 그리 쉽게 포기했을 같지도 않다.
그건 모르는 일이다. 언제나 빈 자리를 채울 사람들은 있으니까.

2016 가장 많은 관객을 동원한 배우라는 기사를 읽었다.  
관객이 이미 확보되어 있는 영화를 많이 해서 그게 큰 부분을 차지했을 거다. 하지만 지난 몇 년 간은 생산적이지 못했다.

독립영화에서 매우 상업적인 영화까지 다양하게 참여한다. 일부러 균형을 맞추려고 하는 편인지?
언제나 그런 균형을 맞추길 원했다. <아이언 맨>에서 존 파브르 감독이 로버트 다우니 같은 배우와 함께 작업했던 방식을 좋아한다. 그는 내가 오랫동안 좋아했던 감독이다. 사실 만화 팬은 아니지만. 팀 버튼 감독의 <배트맨>도 좋아했지만, 내 장르는 아니었다. 하지만 파브루 감독의 경우엔 당신이 말한 그런 균형감각을 가지고 있다. 독립 영화에서나 가능한 창의적인 영혼과 든든한 예산을 가지고 적당한 선을 지킨 영화를 만든다. 아주 전례 없는 경우다. 완전히 새로운 스토리텔링이었다. 이후로 DC와 워너브라더스 같은 다른 스튜디오들이 그런 식의 작업을 하기 시작한 걸 보면 제대로 먹혔다고 본다. <수어사이드 스쿼드>의 캐스팅을 봐라. 윌 스미스야 블록버스터에서 많이 봐 왔지만, 조커 역에 자레드 레토를 캐스팅했다고? 정말 환영할만한 트렌드다.

본인의 작품에 대한 인터뷰나 잡지 리뷰 같은 읽는 편인가?
리뷰도 읽고 인터뷰도 읽는다. 굳이 좋은 리뷰와 나쁜 리뷰를 골라서 보진 않는 편이지만, <뉴욕 타임스>만큼은 챙겨서 본다. 늘 궁금하고 도움이 된다. 나는 내가 하는 작품이더라도 언제나  의견을 가지고 있다. 비단 내 연기에 대해서 뿐만 아니라 전반적인 영화 자체에 대해서 말이다. 그리고 대부분은 당신이 보이는 반응과 비슷한 경우가 많다. 좋거나 나쁘거나 간에 말이다. 가끔은 “그래, 나도 이렇게 말아먹고 싶진 않았어”라는 생각을 할 때도 있다. 아주 가끔 나는 아주 좋았는데 다른 사람들은 전혀 좋아하지 않는 경우도 있다. 그럴 때면 그냥 “그래”하고 만다.

영화 제작은 엄청난 강도의 공동작업이다. 여러 명의 팀으로 움직이는 작업이고 당신도 가끔은 일부일 따름인데, 얼마나 속상했을까.
원하는 대로 되지 않았을 때?

그럴 그게 누구 잘못인지 드러나는 편인가?
적어도 나는 누구 잘못인지 안다! 맙소사. 영화가 정말 성공했는데 정작 나는 그 이유를 모르고 있을 때도 있다. 그런 즐거운 놀라움도 가끔 발생하곤 한다. 예를 들어 <사랑도 통역이 되나요>를 찍었을 때 그 누구도 소피아 코폴라 감독의 비전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저 시차가 가져다주는 이상한 흥분감과 새로운 환경 속에서 27일 동안 영화를 찍어댔을 뿐이었다. 아마도 사진 촬영 담당 감독이었던 랜스 어코드만이 우리가 뭘 찍고 있는지 파악하고 있지 않았을까. 스크립트를 읽었을 때도 나는 몰랐다. 그저 빌 머레이와 함께 연기하면서 내 캐릭터가 겪는 일을 함께 경험하고 있었을 따름이었다. 영화가 개봉했는데 많은 사람에게 공명을 일으켰다. 나로선 전혀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당신이 영화에 캐스팅됐을 겨우 17살이었다. 지금 다시 보면 어떤 기분이 드는지?
안 본 지 꽤 오래됐다. 아마도 ‘아 나 정말 젊었구나’ 하겠지.

영화 샬럿은 25살이었고 면밀한 캐릭터였다.
당시 이미 나는 거의 10년째 일을 하고 있었다. 항상 나보다 나이가 많은 친구와 동료들에게 둘러싸여 살았다. 그런 환경 덕분에 또래들보다 이해력이 더 좋지 않았을까?

<호스 위스퍼러 The Horse Whisperer>에서 당신을 가르쳤던 로버트 레드포드는 당신을 ‘30 같은 13이라고 묘사했었다. 언제나 그렇게 조숙한 영혼을 가지고 있었나.
모르겠다. 얘기했듯이 어릴 때 나는 자신을 돌봐야만 했다. 여러 가지 의미에서 스스로 책임져야만 했던 시기다. 

나름 존경받는 평론가인 안토니 레인은 일찌기 당신을 너무 치켜세우는 글을 써서 몇몇 독자들이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물론 레인을 정말 지적이고 사려 깊은 평론가라 생각하진 않지만, 이따금 남성용 잡지의 리포터들은 아름답고 젊은 여자 배우에 대해 제한적인 시각을 가지고 묘사하는 때도 있다.
사실은 몇몇 여성 기자들로부터 똑같은 경험을 한 적이 있다. 그들의 경우엔 자신을 투영하고 싶어 한다. 자기 자신을 상대에게 빗대서 비교하고 싶어 하는 이상한 버릇이 있다. 어떤 여성 인터뷰이에 대해 여성 기자들이 가끔 이렇게 쓰는 경우들이 있다. “이 완벽한 여인을 보고 있노라니 내가 지난 나흘 동안 샤워를 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게 됐다.” 뭐 그런 식. 그런 글은 공허할 뿐만 아니라 재미도 없다. 그냥 잘못된 접근 그 이상이다. 그 사람의 핵심이 무엇인지, 무엇이 그들을 창의적으로 만드는지를 다루는 게 아니라 그냥 겉껍데기만 긁어대고 있으니 말이다. 아주 지루한 인터뷰도 무척 많이 읽어봤다. 물론 이 인터뷰는 아니지만. 지루하지 않은 정도가 아니라 당신은 대화하기에 아주 좋은 사람이다. 인터뷰가 이상해지는 건 그게 자기비하적으로 흐르기 시작할 때부터다. 왠지 모르겠지만 그런 인터뷰는 아주 진을 빼놓는다.

그런 식의 자기 투영을 견디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겠다.
사실 굉장히 이상하다. 희극에 가깝다. “지금 대체 내게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걸까”라고 생각하게 되는 경험을 많이 한다. 아직도 가끔 내 직업이나 그 직업으로 가야만 하는 장소에서 놀랄 때가 있다. 하지만 일상은 그냥 흔한 반복일 따름이다.

“지금 대체 내게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걸까”라고 생각하게 되는 경험을 많이 한다. 아직도 가끔 내 직업이나 그 직업으로 가야만 하는 장소에서 놀랄 때가 있다.

회의론자나 피해망상증 환자처럼 보이고 싶진 않지만, 점점 미래엔 프라이버시가 현금보다 귀해질 거라는 생각이 든다. 사실 지금도 주머니에 들어 있는 물건으로 인해 추적당하고 있는 셈이고, 기업들은 정보를 가져가고 있는데도 생각 없이 살고 있는 같다.  
정말로 공감한다. 나 역시 그런 경험이 많다.

2011 이메일을 해킹당한 적이 있지 않았나?
정말 미칠 뻔했다. 그 일로 인해 내가 얼마나 약한 존재였는지를 깨달았다. 그 해커는 나 말고도 50명의 이메일, 그뿐만 아니라 그의 전 여자친구의 이메일까지 해킹했다.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는 일이다. 확실히 우린 그런 데 무뎌지고 있다. 사람들은 “누가 나를 해킹하겠어”라고 하지만, 그 사람 역시도 취약한 공격대상일 뿐이다.

거의 모든 사람의 이메일이 나쁜 의도 앞에 노출된 아닌가?
이메일은 사생활이다. 그게 아주 친한 친구에게 쓴 메일이건, 친동생에게 쓴 것이건 그건 사적이다. 일기 같은 거다. 그걸 뒤지는 건 미친 짓이다.

소셜 미디어를 끊었다고.
사실 한 번도 그 유행에 올라탄 적이 없었다. 부재중 전화가 떠도 다시 전화를 걸지 않고, 심지어 보이스 메일도 확인하지 않는다. 성격에 안 맞아서. 물론 그게 많은 회사를 위한 훌륭한 도구라는 걸 알지만 살면서 그게 유용하다는 생각은 안 해봤다. 사실 여유가 없어서 안 한다. 만약 내가 소셜 미디어 계정을 만든다면 다른 누군가에게 관리를 맡겨야 할 텐데, 그건 정말 하고 싶지 않다. 이미 휴대폰으로 뉴스를 너무 많이 본다는 생각도 한다. 얼마 전 핸드폰이 고장나서 한 20시간 동안 휴대폰 없이 살아본 적이 있는데, 아주 환상적이었다. 신이 날 정도로. 아이와 함께 있었는데, “아무것도 필요하지 않아, 내 아이만 있으면 난 좋아”라는 기분이었다.

아마도 당신은 요즘 젊은 배우들이 겪고 있는 검증 논란으로부터 자유로운 마지막 세대가 아닐지?
그런 것 같다. 요즘 젊은 배우들이 연기하는 걸 보고 있으면, 그들이 어떻게 보여야 하는지, 대중들이 그들을 어떻게 봐야 하는지, 그리고 어떤 페르소나를 담아내야 하는지를 미리 알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든다. 그리고 그건 불행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앞으로 있을 새로운 일에 대한 얘기를 해달라.
처음엔 내가 품었다가 다시 돌려줄 수 있는 어떤 물성 같은 걸 찾는 것부터 시작한다. 늙는 걸 걱정하는 사람에게서 보이는 자의식이라거나, 아니면 <공각기동대>의 소령처럼 자기 자신에 대한 감각을 잃어버렸다거나. 그녀는 자신의 육체에 대해서는 알고 있지만 자신의 자아에 대해서는 알지도, 신경을 쓰지도 않는다.

그건 <언더 스킨>이나 <Her>에서 당신이 연기했던 캐릭터들과도 비슷하다. 캐릭터들의 의식도 분리되어 있지 않나?
<Her>를 촬영할 때 나는 오히려 나 자신을 더욱 극명하게 인지할 수 있었다. 촬영 내내 검은 색 방 안에만 있었으니까. 목소리만 등장하기 때문에 오히려 내가 지닌 버릇에 집중할 수 있었다. 호아퀸 피닉스와의 섹스 씬은 그야말로 공허한 실습 같았다. 

황당한 경험이었나?
아마 호아퀸 피닉스는 처음에 정말 불편해 보였다. 이것저것 요구당하는 그를 지켜보는 건 꽤 흥미로운 일이었다. 그에 비하면 나는 별로 힘들지 않았다. 그저 검은 방 안에서 “계속해봐요, 나 지금 달아올랐어요, 어서요, 더 과감하게.”라고 말만 했으니까. 그 검은 방 안에 있으면 아무도 당신을 볼 수 없다는 점 때문에 내가 원하는 누구라도 될 수 있을 것 같다. 완전히 자신에게 몰입할 수 있다. 하지만 내 목소리에 그가 반응하는 모습은 흥미로웠다. 결국 우린 해 냈다. 이 영화를 통해서 내가 존재하는 물성에 대해 깊이 생각해보게 됐다. AI가 하는 대사를 이해하는 것, 그것에 내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 어떤 사람과는 같이 있고 싶고 어떤 사람과는 멀어지고 싶은지 그런 감정이 왜 생기는지, 이것저것에 대한 자의식은 어떻게 생겨나는지 말이다. 반면, <언더 더 스킨> 에서는 이 모든 것들로부터 멀어져서 순수하게 본능적인 동물이 될 수 있을지를 생각했다. <공각기동대>를 찍을 때는 육체적인 징후가 전혀 없었다. 내 몸이 내 것이 아닐 때 어떤 느낌을 받을지? 그녀의 마음과 육신은 분리되어 있으므로 먼저 생각을 하고 그다음에 행동으로 옮겨야만 하는 존재였다. 이런 것들이 내가 연기를 시작하는 방식이다. 물론 조사도 한다. <히치콕>에서 자넷 레이를 연기할 때는 이 불타오르는, 의지로 충만한 여자는 어떻게 서 있는지, 자신의 강점에 대해 어떻게 말하는지를 연구했다.

당신은 아서 밀러의 <다리 위에서 풍경>이나 테네시 윌리엄스의 <뜨거운 양철 지붕 위의 고양이 유리 동물원> 같은 풍성하고도 복잡한 연극의 리바이벌 버전에도 출연했다. 뉴욕에서 자란 만큼 브로드웨이가 꿈이었던 적은 없나?
당연히 엄청난 꿈이었다. 사실 그래서 연기를 시작했다. 브로드웨이에서 연극을 하고 싶었다. 8살 무렵에는 정말 절실하게 브로드웨이의 무대에 오르는 꿈을 꿨다. 지금은 절대 하지 않겠지만, 뮤지컬 무대에도 서 보고 싶었다. 지금 사람들 앞에서 노래를 부르며 춤을 춰야 한다면 아마 녹아서 사라져버릴 것이다. 끔찍하게 망해 버릴 거다.

당신은 감각이 없거나 인지가 없는 상태에서 다른 사람들과의 교감을 통해, 혹은 세상을 관찰하면서 전혀 다른 존재가 되어 가는 역할을 많이 맡아 왔다. 아마도 딸을 키우다 보면 그런 모습을 딸을 통해 보게 수도 있겠다. 우리 모두는 그렇게 반복적으로 같은 과정을 거치며 변해가는 존재라고 생각하는지?
잘 모르겠다. 처음부터 끝까지 변하지 않는 캐릭터를 연기해 보는 것도 재밌겠다. 하지만 그게 보기에도 다른 사람이 보기에도 재미있으리란 보장은 못 하겠다. 변할 수 없거나 변하길 원치 않는 캐릭터 안에는 어떤 파워풀한 부분이 있을 것도 같다. <배리 린든> 같은 영화나 도리안 그레이 같은 캐릭터를 보면 그 안에 분명 엄청난 무언가가 있다. 그렇게 변하고 싶지 않아 하거나 변할 수 없는 캐릭터들의 종국을 보고 있으면 나도 그런 경험을 해 보고 싶다는 생각을 할 때가 있다. 분명 더 많은 사람들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테니 말이다. 아마도 그런 게 내가 다음에 해 보고 싶은 건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지금까지는 변화하는 사람을 이해하기 위해 노력했던 것 같다. 어쩌면 이제서야 변하지 않는 어떤 캐릭터를 연기할 수 있게 된 걸지도 모른다.

배우에게는 언제나 많은 가능성이 열려 있는 같다.
그게 바로 아주 달콤한 부분이다. 나는 언제나 스스로에 대해 궁금해하고 그걸 알아내려고 애쓰는 인간이다. 아마도 내 주치의는 “음, 실수할 때도 있지요, 그러니까 같은 실수를 안 하면 돼요.”라고 말해줄 것 같다. 나도 같은 실수를 또 하고 싶지는 않다. 하지만 살아가다 보면 결국 같은 실수를 몇 번이고 또 몇 번이고 반복하게 마련이다.

그러다가 어느 날부터는 실수하지 않게 될까?
그랬으면 좋겠다. 하지만 사람이 같은 실수를 반복한다는 것, 혹은 스스로 변하고 싶지 않아 한다는 건 흥미로운 부분이 아닐까.

친한 사람 중에 몇몇 그런 사람들이 있는 같다.
난 내가 그런 사람들을 다 만나본 줄 알았는데, 혹시 남는 사람 없나?

Credit

  • 에디터 백가경
  • 포토그래퍼 Jake Chessum
  • PLAYBOY US 편집팀
닥터플레이보이 7월 2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