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중현

신중현은 보여줄 게 더 남았다고 했다. 끝장을 볼 때까지.

서울을 떠나 한적한 곳으로 오신 지 벌써 10년이 넘었죠?
처음엔 적응이 안 돼서 고생했어요. 번잡한 데 있다 오니까 적적하고 힘들더라고. 아무것도 못했어요. 이걸 이겨내야 제정신이 날 거다, 싶었죠. 요즘에는 잘 왔다는 생각이 들고.

2006년 은퇴 선언 직후에 이사를 결심하신 건가요?
그렇죠. 은퇴 공연 몇 번 하고 왔죠. 와서는 혼자 수양하는 기분이었어요. 도 닦는 기분.

2000년대 초부터 신중현과 더 멘의 <거짓말이야>를 비롯해 <히키신 키타멜로디 경음악 선곡집>, <빗속의 여인> 등이 재발매되며 본격적으로 재조명이 이뤄지던 시기였는데, 전격 은퇴를 선언하셨죠.
여러 장르의 음악이 등장하던 시절이라 제가 나와선 안 되는 건데…. 정리하는 입장에서 그런 걸 내놓는 게 낫겠다 싶어서 한 거예요. 사실 할 일이 없으니까 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들기도 했죠. 공연도 마찬가지고.

여전히 정리한다는 맘으로 이곳에 내려와 계신 건가요?
정리는 병행하는 거고, 여기 있는 동안 연구를 많이 했어요. 기타 주법이나 창법도 많이 바뀌었죠. 9월에 MBC 앞 광장에서 행사를 해요. 가수들이 제 헌정 공연을 한대요. 그래서 답례로 20~30분 동안 연주를 할 거예요. 새로 쌓은 음악성을 음악계에 좀 알리려고. 세계적으로도 알리고 싶고.

세계적으로라면 이미 지난 5월, 버클리 음대에서 명예박사 학위를 받으셨죠.
영광이죠. 세계적 음악인들이 주시하는 음악 전문 대학에서 학위를 받았다는 게. 하늘이 준 선물이라고 생각해요.

현장에도 다녀오셨죠?
가서 기타 솔로도 했어요. 학위 주는데 받아만 오는 것도 멋쩍더라고요. 내가 기타 플레이어고 음악 하는 사람이다, 라는 모습을 보여줘야겠다는 의미였죠.

미국 학생들이 연주하는 신중현의 곡은 어땠나요?
가사가 한국말이니 노래는 주로 한국 학생들이 불렀어요. 잘하더라고요. 나름대로 편곡해서 특성을 잘 살렸달까. 곡을 예리하게 파헤쳤더라고.

외람된 말씀이지만, 그 학생들과 달리 정규 음악 교육을 받으신 적은 없어요. 혼자 습득하신 쪽이죠.
저는 사이키델릭 록을 추구했거든요. 사이키델릭 록이 워낙 광범위하니, 표현하기에 따라 다 달라져요. 그 학생들도 제 방식대로의 세계를 찾아서 형성한 거죠. 그런 부분이 인상적이었어요.

당시 “세계적으로 인정받는다는 것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더 이상 바람이 없을 정도로 좋은 결실을 주신 듯하다”고 하셨어요.
당연한 거죠. 한국에서 아무리 음악을 해도 세계에 알릴 기회는 많지 않아요. 그 이상 좋은 게 없죠.

올해로 데뷔 60주년. 한국에서는 성과만큼 정당한 인정을 받아왔다고 생각하시나요?
인정을 받은 거죠. 한국 사람들의 음악 수준이 낮은 것도 아니고. 제가 버틸 수 있었던 건 그분들이 제 음악성을 어떤 식으로든 판단해줬기 때문이에요. 물론 제 음악이 처음엔 거부감이 들 수도 있어요. 쉽지만은 않으니까. 사실 한 10년 주기로 인정받은 게 좀 섭섭하긴 해요. 나중에 말고 당시 나왔을 때 곧바로 그랬으면 좋은데.

하지만 여전히 타협할 생각은 없으신 거잖아요.
그렇죠. 록은 세계적인 것이기 때문에 노래를 세계에 맞춰야지, 그 밑의 수준으로 만들 순 없으니까.

“저는 좀 텁텁하고 서민적이고 와일드하고, 밑바닥 쪽이죠. 우리만이 갖고 있는 흥과 장단이 있어요. 그런 게 멋있다고 생각하고요. 또 록에 딱 맞아요. 거기에 세계에 대항할 수 있는 파워가 있는 거예요.”

비틀스나 지미 헨드릭스가 등장했을 땐 어떤 인상을 받으셨나요? 자신보다 우위에 있다거나 비슷해서 반가웠다거나.
솔직히 얘기해서 저는 1950년대 중반부터 음악을 했고, 이미 나름대로 록을 터득했다고 자부하고 있던 때였어요. 그러니까 그런 친구들이 나왔을 때 우습게 봤죠. 저 정도 가지고 뭘 하려고 하나…. 젊을 때다 보니까 건방졌죠. 지나고 나서 위대한 사람들이라는 생각을 하게 됐고요.

2011년 미국의 라이트 인 더 애틱 레코즈에서 발매한 컴필레이션 음반 <Beautiful Rivers And Mountains: The Psychedelic Rock Sound Of South Korea’s Shin Joong Hyun 1958-1974>야말로 확고한 전환점이 아니었나 싶어요. ‘세계적’이라는 관점에서라면.
숨은 인재들의 음반을 내는 회사니, 세계 곳곳을 찾아봤겠죠. 그러다 저를 발굴한 거고. LA에 초대받아서 대표를 만났는데, 역시 음악성을 알더라고요. 예리해. 하여튼 그 대열에 제가 끼었다는 것 자체가 일생에서 둘도 없는 기회였다고 봐요.

첫 곡이 ‘달마중’이죠. ‘한국적’이라는 모호하고 막연한, 아직도 답을 찾지 못한 말이 끝내 선명해지고야마는 곡.
저도 그 친구가 그 노래를 골랐을 때 놀랐어요. 제가 1958년에 처음 녹음한 곡이거든요. 장충 녹음실에서 마이크 하나 놓고 밴드 멤버들이랑 빙 둘러서서 연주한 거예요. 요새야 멀티 녹음 기술이 엄청나니, 지금 생각해보면 어떻게 그렇게 녹음했나 싶어요.

<히키신 키타멜로디 경음악 선곡집>은 한 곡 녹음에 연주를 몇 번쯤 반복하셨나요? 모두 ‘원 테이크’인가요?
그렇죠. 한 번에. 그때만 해도 녹음할 정도면 한 번에 끝내야 한다는 개념이 있었어요. 음악계 전체에. 그런 실력이 안 되면 레코딩을 할 수 없었고. 두 번 하는 건 예의가 아니었어요.

흔히 말하는 음반의 러닝 타임과 녹음 시간이 똑같은 음반이네요.
그렇죠. 그러니까 살아 있는 거죠.

기타 실력은 언제쯤 완성됐다고 확신하셨나요?
요즘 와서야 기타라는 걸 겨우 알았어요. 록은 하나의 대화 통로예요. 고정된 음악이 아니라 록이란 형태에 자기 문화를 얹을 수 있는 장르가 된 거죠. 일본 록, 영국 록 다 달라요. 그래서 저도 ‘엽전들’이란 밴드 이름도 붙이고 한국 가락으로 ‘미인’ 같은 곡도 쓰고 그랬던 거예요. 그런 취지로 열심히 했지만, 세계적으로 독특한 어떤 선을 넘어야 하거든요. 그래서 약지 빼고 세 손가락으로만 연주하는 3.3 주법 같은 걸 개발했어요. 끝장을 보려고 만들어는 놨는데, 말로만 떠들었지 보여준 게 없으니까. 여기로 이사온 뒤에 더 많이 발전시켰어요.

그렇다면 한국 록은 어떻게 다른가요? 장기하와 얼굴들의 기타리스트 하세가와 요헤이는 “신중현의 음악에선 고려인삼 냄새가 난다”고 말하기도 했어요.
이탈리아 음악이든 독일 음악이든 그 나라 분위기가 나요. 토속적 감정과 음악성이 숨어 있죠. 예를 들어 일본 음악은 아기자기하고 기교가 뛰어나고 매끈하달까. 저는 좀 텁텁하고 서민적이고 와일드하고, 밑바닥 쪽이죠. 우리만이 갖고 있는 흥과 장단이 있어요. 그런 게 멋있다고 생각하고요. 또 록에 딱 맞아요. 거기에 세계에 대항할 수 있는 파워가 있는 거예요.

텁텁하다, 란 말이야말로 정확하다는 인상이에요. 신중현의 음악에 대해 말하자면.
적당한 단어가 없어요. 저에 대해 아는 사람도 없고. 우리 아들들도 저를 잘 몰라요. 좋아하긴 하는데, 뭔지는 모르는 거야.

발매한 음반은 다 갖고 있으세요?
몇 개 구하긴 했는데, 많이 없어요. 그래도 제가 녹음해놓은 게 많아서 다 있는 거나 마찬가지죠. 사실 내 판이 언제 나왔는지도 잘 몰라요. 한참 누가 듣는 거 보면 내 판이고 이래요. 발표하고 나면 잊어버려야 또 새로운 감각을 받아들일 수 있거든요. 기억에 자꾸 남아 있으면 새 곡을 써도 또 그 곡 같고 그래요.

지금까지 발매한 음반 중 가장 애착이 가는 것을 꼽는 것도 무리일까요?
대중이 좋아한 곡들이 다 애착이 가요. 대중은 정확해요. 나쁜 건 안 받아주죠.

하지만 김정미의 <Now> 같은 걸작은 대중적 성공과는 거리가 멀었잖아요.
그런 건 또 다른 의미로 애착이 가요. 제 나름의 음악 세계를 찾다 보니 애초에 대중성이 없던 음반인 거죠. 발표해도 들어주지도 않고… 지금은 이해해요.

록의 대부’란 말이야말로 불충분하다는 생각이에요. <Now>의 사이키델릭 포크, 박인수와 김추자의 솔, <히키신 키타멜로디 경음악 선곡집>에서의 재즈와 블루스….
그렇게라도 안 하면 잘 모르니까. 다행이라고 생각해요. 어떤 타이틀이 있어야 그걸 보고 사람들이 좇아오니까.

최근엔 훵크를 위시한 ‘레어 그루브’의 관점에서 신중현의 음악에 접근하는 경우가 빈번해 보이기도 해요.
그래요? 저는 근본적인 음악을 한 거죠. 루트죠. 뿌리. 지구상에서 가장 음악이 번창한 때가 1950년대 중반부터 1970년대 전까지예요. 세계적으로 그만한 음악 붐이 생긴 적이 없어요. 그렇기에 그 이상의 음악이 존재할 수 없고. 거기서 한 단계 더 올라서려면, 토속 음악으로 다가가야 해요. 원초적인 음악을 다시 꺼내서 새롭게 만드는 방법뿐이에요. 요즘 음악은 다 예전에 나온, 이미 피크를 올린 것들이에요. 그러니까 아주 원점, 옛날 루트로 가야 해요.

전자음악은 새로울 수 있지 않을까요? 지금 이 방엔 기타보다 신시사이저가 더 많네요.
전자음악이란 게 음을 발전시키는 이펙트적인 거거든요. 신시사이저는 소리를 변화시키는 거잖아요. 사이키델릭 효과 같은 걸 잘 이용하는 쪽으로 갈 순 있어도, 그래 봤자 그 음악이 그 음악이라고 생각해요. 물론 음악가가 어떻게 요리하느냐에 따라 달라질 순 있겠지만.

한 인터뷰에서 “우리나라에 프로툴이나 로직 같은 음악 프로그램을 도입한 사람은 아마 제가 처음이 아닐까 싶습니다”라고 하셨죠. 보조적 도구에 가까웠다고 볼 수 있을까요?
제가 컴퓨터 음악을 1980년에 시작했어요. 그땐 그걸 하는 사람이 없었죠. 차에서 AFKN을 틀고 가는데, 새로운 음악이 딱 나오더라고. 어, 이건 사람이 한 게 아닌 거예요. 그때부터 한 달 동안 매일 새벽에 출근하듯 나가서 컴퓨터를 배웠어요. 신시사이저를 미디로 연결해보니까 오, 괜찮더라고. 이걸로 새로운 음악을 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는데, 또 어느 정도 지나니까 싫증이 났어요. 그때부터 역시 사람이 해야 하는 거구나, 답이 나왔죠. 요즘 집에서도 계속 녹음 작업을 하고 있어요. 좋은 기회가 생기면 음반이 나올 순 있겠지만, 쉽지 않아요. 다 디지털이잖아요. CD 자체가 소리에 한계가 있으니. 저는 음악 들을 때도 아날로그 앰프로 들어요. CD는 들어봐야 감이 안 와요. 디지털이라는 게 소리를 딱 추린 거잖아요. 음을 깎아서 내보내는 거라 깔끔하겠지만 알맹이가 빠진 거예요. 뼈다귀가 없는…. 전체적인 음이 확 와야 그걸 받아들이는 몸의 감각이 살아나고, 음악도 살아 있다는 걸 아는데.

풀 사운드’가 아니란 말씀이시죠?
그렇죠. 그냥 소리예요 소리, 오락에서 나오는 소리 같은. 음악 들으면서 슬퍼할 수도, 즐거워할 수도, 웃을 수도 있어야 하는데. 그게 원래 인간이거든요. 인간은 원래 그런 감각이 있어요. 하지만 이제는 필요 없으니까 체질이 바뀌는 거죠.

음악 감상의 감각을 되살리기 위해 아날로그 발매, 아날로그 녹음이 필요하다 생각하시는 건가요?
생음악을 들어야 해요. 라이브. 인간의 직접적 온기가 있는 소리. 그래야 그 가치가 있는 거지. 그런데 요즘은 공연장 믹서도 전부 디지털이에요. 객석에서도 진정한 음악은 하나도 못 듣는 거죠. 그래서 집에 저런 대형 스피커를 갖다놓은 거예요.

다른 뮤지션의 음악도 들으세요?
외국 음악은 듣죠. 지미 헨드릭스라든가.

직접 만드신 음악 중에서는요?
최근에 녹음한 거 듣고 또 듣고 그래요. 계속 실험하는 단계예요.

60주년을 맞아 올해 뭔가 해야겠다, 생각하고 계시나요?
에이, 그런 시기는 지났고요. 제 할 일만 하는 거예요. 못한 걸 어떻게든 이뤄야겠다.

못한 것?
음악엔 만족이 없어요. 지금부터 할 수 있는 한 제 능력을 최대한으로 담아놓고 싶고, 거기에만 몰두하고 있어요.

1960~1970년대에 만든 음악도 100% 만족스럽지 않으세요?
그건 젊을 때 한 거니 패기가 있죠. 두 번 다시 할 수 없고. 높이 평가해요.

타임머신이 있다면 언제로 돌아가고 싶으세요?
아휴, 하도 고생을 많이 해가지고. 아까도 얘기했지만 어떤 음악이 10년 후에나 인정받는다는 건 당시 경제적으로는 아주 힘들었다는 얘기예요. 저는 그냥 쏟아붓기만 했어요. 누가 다시 태어나도 음악을 하겠냐고 묻더라고요. 그래서 대답했죠. 태어나지 않을 거다. 끔찍해서. 물론 예전에 해놓은 거 들으면 어떻게 저렇게 했나 싶은 것도 있어요. 하지만 두 번 하라면 그렇게 못하죠.

화려한 때도 있었잖아요. 미8군 무대에서 재키 신이란 이름으로 유명세를 탔을 때, ‘님아’가 처음 히트했을 때, ‘미인’이 전국을 강타했을 때.
항상 박수를 받을 때마다 부담이 있었죠. 박수의 대가라는 게 있으니까.

그 순간을 즐기지 못하셨던 거네요.
전혀. 기억도 안 나고 계속 쫓기는 기분이었어요. 그렇게 지금까지 온 것 같아요.

김추자, 김정미, 펄 시스터즈, 장현 등 협업한 가수들과 지금도 교류하시나요?
아니요. 가수들도 결혼하면 끝이거든요. 접촉이 안 돼요. 저도 한번 같이 음반 내고 나면 바로 다른 사람 찾는 습관이 있었고. 그렇게 새로운 걸 추구하다 보니까 가수들한테 환영을 못 받았어요. 그 사람들 눈엔 제가 너무 차가웠겠죠. 나는 그 길로 가야 하니까 어쩔 수 없었어요.

그래도 섭섭하지 않으세요? 히트곡을 준 작곡가로서.
한번 스타가 되면 안 와요. 그렇게 열심히 가르쳐서 스타 만들어줬는데, 어떻게 그림자도 안 비치냐.(웃음) 그게 괘씸해서 더 차갑게 군 것도 있어요. 성격도 많이 변했고.

너무 혹독한 트레이닝 때문은 아니었을까요?
아니에요. 전 가수들한테 굉장히 잘해줘요. 오히려 그래서 탈이었나? 녹음하기 한 6개월 전부터 계속 연습 장소에서 트레이닝을 했어요. 뭐든 쉽게 처리했거든요. 연습할 오케스트라 오라 그러면 오지, 스튜디오 바로 잡지. 다 일사천리로 진행했으니까. 가수들이 따로 신경 쓸 게 없었죠.

한 소절 한 소절 불러가며 가르쳤다는, 그야말로 ‘디테일’한 선생님으로 알려져 있죠.
주입식이죠. 기계적으로 안 되면 될 때까지 반복했어요.

김추자, 김정미, 이정화 모두 마찬가지였나요?
그렇죠. 근데 트레이닝이 아니라 자기 능력으로 다 한 줄 안다니까(웃음). 계속 자신감을 길러줬죠.

춤까지 모두 직접 가르치셨나요? 유튜브에 화려한 안무가 압권인 김정미의 무대 영상이 남아 있어요.
제스처라고 하죠. 무대 매너. 내 노래에 어떤 모션을 써야 하는가. 그것까지 주입시켰죠.

신중현의 춤과 노래엔 섹시한 정서가 분명히 드러나요.
리듬이죠. 미8군 무대에서 오랫동안 밴드 공연하면서 미국 애들이 춤추는 걸 워낙 많이 봤어요. 젊은 친구부터 장교들까지 전부 다 잘 춰요. 몸에 리듬이 살아 있달까. 저 사람들은 어떻게 비트를 타나 세밀하게 관찰했죠.

가장 높게 평가하는 가수는 누구인가요?
다들 열심히 잘했어요. 하루아침에 뚝딱 완성된 것도 아니고. 펄 시스터즈는 내가 집에 가서 가르쳤거든요. 가면 무릎 꿇고 책상에 악보 딱 놓고 기다리고 있었어요. 그게 참 예뻤죠. 김추자는 별일 없어도 항상 아침에 일찍 나왔어요. 그러다가 내가 퇴근하면 그제야 가고.

신중현의 곡에 가장 어울리는 보컬리스트라면요?
가수마다 개성이 다 다르죠. 목소리도 그렇고. 저는 곡을 쓸 때 가수 목소리 듣고 하거든요. 한 가수에게 준 걸 다른 가수가 부르면 그 감이 안 나와요. 김추자 같은 가수가 욕심이 많으니까, 나중에 내 곡을 전부 리메이크했더라고요. 내가 막 노발대발했지. 곡을 다 버려놓은 거야.

한 곡을 다른 가수가 부른 적이 있지 않나요? ‘석양’은 장현과 김추자, ‘봄비’는 이정화와 박인수….
김추자가 부른 건 내 승인 없이 한 거예요. 박인수는 내가 데려다 프로듀싱했죠. 그 친구에 맞게 리메이크를 했는데, 엄청 히트를 쳤고.

2014년, 김추자의 새 음반 <It’s Not Too Late>에 포함된 곡은 신곡이었나요?
곡 달라 그러기에 옛날에 써준 곡 하라 그랬죠. 사실 제가 여태껏 한 김추자 음반은 두세 개밖에 없어요. ‘늦기 전에’랑 ‘거짓말이야’랑 하나 더. 나머지는 다 자기가 다른 밴드랑 낸 거예요.

60년의 경력 중 후회되는 순간도 있으세요?
후회의 연속이죠. 후회라기보다 운명을 받아들이는 거예요.

올해 나온 헌정 음반 <신중현 The Origin>은 어떠셨나요? 후배들이 신중현과 엽전들 1집을 다시 부른.
잘했어요. 아기자기한 편곡을 많이 했더라고. 옛날 곡이지만 자기 스타일이 보여서 좋았어요.

“음악가는 다 똑같아요. 음을 즐기는 거죠. 음악은 철학이 아니에요. 단순히 아 멜로디가 참 좋다, 이렇게 느낄 수 있는 거예요. 동요 같은 걸 들어도 예쁘잖아요. 괜히 복잡하고 어렵게 만들 필요가 없어요.”

오리지널’을 좋아하는 입장에선 원곡을 다소 많이 만진 게 아닌가, 싶기도 했어요.
그런 것도 있죠. 하지만 새로운 세대에 구세대의 것을 주입시킬 수는 없는 거고, 소화가 될 리도 없고. 자기들 취향에 맞게 했기 때문에 인정하는 거죠.

2006년 은퇴 발표 즈음엔 당시 음악계에 대한 쓴소리를 서슴지 않으셨죠. 지금도 그 맘은 같나요?
지금도 얘기하자면 끝이 없죠. 한 가지는, 작곡이라는 게 작곡법을 알아야 하거든요. 작곡법은 베토벤부터 지킨 거예요. 유명한 음악가들은 그걸 벗어나질 않죠. 그런데 지금 젊은 친구들이 작곡법을 완전히 무시한 작곡을 하고 있어요. 그렇게 성공했다고 생각하겠지만, 그렇지 않아요. 작곡법에서 제일 중요한 게 모티브거든요. 주제. 주제가 없는 음악은 다음 세대에 가면 사라져요. 베토벤의 작품이 지금까지 살아 있는 건 모티브가 있어서예요. 예를 들면 “짜자자잔, 짜자자잔” 하는. 내 얘기는 요즘 음악이 나쁘단 게 아니라, 더 잘되게 하기 위한 꾸지람이에요.

말씀보다 더욱 위력적인 새 음반을 기대할 수 있을까요?
그런 욕심이 있긴 한데, 저는 보여줄 건 다 보여줬어요. 작곡법 같은 건 지금까지의 음반에 다 들어 있죠. 제가 할 일은 그게 아니라 그 이상의 새로운 음악성을 끄집어내는 거예요. 요즘 제가 녹음하는 음악은 굉장히 단순해요. 하지만 그 안에서 모든 게 다 나와야 한다는 거죠.

베토벤도 로큰롤을 좋아했을까요?
당연하죠. 음악가는 다 똑같아요. 음을 즐기는 거죠. 음악은 철학이 아니잖아요. 단순히 아 멜로디가 참 좋다, 이렇게 느낄 수 있죠. 동요 같은 걸 들어도 예쁘잖아요. 괜히 복잡하고 어렵게 만들 필요가 없어요.

한 인터뷰에서 “음악은 어디까지나 음악이라는 것. 결코 철학이나 장사가 돼서는 안 된다”고 하셨죠. 장사가 아니란 말은 익숙하지만, 음악이 철학이 돼서는 안 된다는 말은 꽤 다르게 들렸어요.
음악이라는 건 그걸 느끼는 감각에서 철학이 생기는 거예요. 예쁜 멜로디를 들었을 때 어떤 느낌을 갖는 것 자체가 철학이라는 거죠. 어렵게 분석하는 게 아니라, 우리가 인간으로서 느낄 수 있는 것. 그게 가장 좋은 철학 아니겠어요?

저기 2009년 펜더사로부터 헌정받은 기타가 있네요. 은퇴를 번복하고 무대에 다시 오른 계기가 된.
세계에서 여섯 번째로 받은 건데, 한마디로 있을 수 없는 일이었죠. 아무한테나 주는 게 아니잖아요. 내가 세계적으로 알려진 사람도 아니고.

놀라셨나요?
저걸 왜 나한테 줄까, 생각했죠. 받았으니 그 대가로 뭔가 해야겠더라고요. 그때부터 다시 집중적으로 기타에 매달렸어요. 전까지는 다 포기하고 지냈는데, 저 기타가 큰 계기를 만들어줬어요.

지금은 저 기타로만 연주하시나요?
그럴 수밖에 없는 게, 프렛이 일반 기타보다 넓어요. 거기 습관을 붙이니 다른 기타는 손에 안 맞아요. 소리도 아주 좋고.

기타리스트 신중현, 작·편곡가 신중현, 프로듀서 신중현, 밴드 리더 신중현, 보컬리스트 신중현…. 감히 다른 사람은 정의할 수 없는, 신중현은 누구인가요?
저도 그것 때문에 고민한 적이 있어요. 저기 문화훈장이 있거든요. 호칭을 뭐라 기입해야 하냐고 묻더라고요. 한참 생각하다 그냥 음악인이라고 하세요, 그랬죠. 내가 아는 게 음악밖에 없으니 음악은 떠날 수 없겠죠.

선생님의 전성기는 언제였나요?
음… 없었던 것 같은데. 미8군 시절에 인기가 참 좋긴 했죠. 재키 모르면 미군이 아니다, 소문이 날 정도였어요. 제가 7사단에서 공연하면 2사단에서 트럭 대절해 와서 구경하고. 그때가 전성기였나?

미인’보다 진한, 처음 받은 환호였던 거네요.
그렇죠. 기립박수까지 받았거든요. 그 기억이 지워지지 않죠.

다음 달 서울 공연에서 기립박수를 받으면 어떤 기분일까요?
모르죠. 느껴봐야, 가봐야 알겠는데요.

Credit

  • 에디터 유지성
  • 포토그래퍼 안웅철
  • 헤어 김민지
  • 메이크업 김민지
닥터플레이보이 7월 2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