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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필순이 ‘살아남은’ 이유

"10대, 20대 초반에는 아무도 나한테 가수하라고 안 했어요."

가을이네요. 제주는 계절이 좀 늦죠?
난 그래도 산 쪽에 살아서 요즘은 이불 덮고 자요. 제주에 오래 사니 내가 이렇게 자연을 좋아하는구나, 생각하게 돼요. 두려움도 덜하고.

자연에 대한 두려움이요?
하다못해 벌레부터 시작해 산짐승 소리도 그렇고. 처음 도시를 벗어나면 적응 기간이 필요하다는데, 가자마자 좋았어요.

제주도 많이 변하지 않았나요?
오늘 오면서 왜 이렇게 많이 변했을까? 생각했어요. 우리 마을만 해도 타운하우스 같은 게 생겼고. 그런데 김포공항에 딱 내리는 순간, 그래도 제주가 좋아. 어떡해.

공항이야말로 그 도시를 가장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곳이죠.
맞아요. 제주공항에 내리면 ‘하’ 하고 숨이 탁 트여요. 오늘은 반대로 김포에서 ‘아’ 했지. 내리자마자 어디로 가야 할지 몰라서.


서울에 자주 오세요?
1년에 열 차례? 요즘은 자주 오죠.

매체 노출도 전에 비하면 부쩍 늘었어요. 한동안 따라붙던 ‘은둔’ 같은 말이 무색할 만큼. 난 그렇게 사람들이 많이 볼 줄 몰랐어요. 어쩌다 방송 나온 게 많이 부각되더라고요.
〈효리네 민박〉이요? 처음엔 촬영인 줄 모르고 갔어요. 그래서 계속 취해서 찍은 거예요. 지은이, 아이유가 제주 내려와서 인사하러 온다기에 내가 갔죠. 지은이가 술 잘 안 마시는데, 나 때문에 몇 잔 마셨어요.

‘지은이가 가장 존경하는 우상이자 선배’라는 자막이 나갔죠. 그런 말은 어떠세요? 아이유뿐 아니라 많은 여성 가수의 롤모델로서.
내가 그만큼의 자질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런 얘길 많이 듣는 건 사실이에요. 한동안은 부담스러웠죠. 그런데 지금까지 내가 그런 걸 신경 쓰면서 음악을 해온 것 같진 않거든요. 이제는 편해졌어요. 꼭 내가 잘하지 않아도 되는구나.


이런 말이 실례가 될지 모르겠지만, ‘살아남았다’고 표현하고 싶어요. 내 위아래로 별로 없기도 해요. (한)영애 언니. (이)소라가 있고, 또 (이)상은 씨. 요즘 후배들이랑 이런 얘기 많이 해요. “제가 5년, 6년째 음악 하고 있는데 선배님처럼 30년 넘게 할 수 있을까요?” 하고 묻더라고요. 의문이라는 거예요.

2002년 〈Soony 6〉 발표 후 똑같은 의문을 가지셨죠. 7집이 나오기까지 11년이 걸렸고.
“안 해야지!” 그랬지. 그냥 재미없었으니까. 재미가 떨어지면 호기심도 사라지잖아요. ‘아 그래, 잘 놀았다. 행복했다’ 그러고 딱 접었어요. 제주도 내려갈 때 생각했죠. 꿈 같은 날이었구나.

지난 3월에 출연한 네이버 온스테이지에서 데뷔 곡 ‘어느새’를 선곡했어요. 놀랍게도.
어디 가서 절대 안 불렀으니까. 네이버 온스테이지 스태프들이 그 노래를 꼭 해달래요. 너무 좋은데 왜 버린 자식 취급 하냐고. 그런 건 아니었어요. 내가 4집, 5집 거치며 한 단계 변화한 때가 있었잖아요. 예전 것들을 붙잡고 있고 싶지 않았던 것뿐이에요. ‘어느새’는 참 멋진 곡이죠. (김)현철이가 양복점에서 옷 맞추듯 만들어준 곡이에요. 정말 이제는 그 노래 가사를 곱씹게 되는…. “어느새 내 나이도 희미해져버리고, 이제는 그리움도 지워져버려.”

1989년, 내가 스물일곱인가 여덟에 그 음반이 나왔어요. 그리고 딱 그만큼 더 살고 다시 부른 거죠. 완전히 다르더라고요.

자기 곡을 다시 부르는 ‘Soony Rework’ 연작이 8편, 신곡 묶음인 ‘소길’ 시리즈가 9편까지 나왔어요. 올해 들어 거의 매달 신곡을 내놓고 있죠. 다시 ‘재미’가 생긴 건가요?
음악이 사람들에게 닿는 과정에 많은 변화가 생겼잖아요. 내가 음악을 하는 자세와 정서는 고집하겠지만 전달 방법을 바꿔본 거예요.

‘소길’의 첫 시작은 이적의 곡 ‘고사리장마’였죠. 의외의 협업.
음악적 솔메이트인 동익이 형이랑 항상 이런 얘길 하거든요. 묵은 노래 꺼내지 말자. 새로 만들어 부풀어올랐을 때 들려줘야 지금의 나를 보여줄 수 있다. 그거 하나만큼은 일심동체예요. 가사도 미리 써놨다 어디 붙이고 이런 거 잘 못해요.


어떤 순간이 정확히 채집된 노래네요.
‘고사리장마’도 (이)적이가 제주 놀러 왔는데, “누나 생각하면서 쓴 노래가 있다”는 거예요. 같이 한잔 걸치고 우리 집 거실에서 가사까지 다 만들었죠. 그렇게 ‘소길’ 시리즈가 시작된 거예요.

정규 음반으로 나오게 되나요?
나와야죠. 열두 곡이 될 것 같아요. 지금 ‘소길’ 커버 사진이 열두 개의 퍼즐인데, 그 퍼즐이 완성되면 내가 찍은 우리 집이 보여요.

장필순의 목소리를 음반이 아닌 형태로 듣는 게 생경하긴 해요.
이렇게 하면 잘되겠지, 라는 기대라기보다 사람들에게 음악을 들려줄 수 있는 다른 문을 열어본 거죠.

씨앗 뿌리는 마음 같은 걸까요?
그렇죠. 그리고 자주 곡을 내니까 음악 하는 친구들이랑 교류가 생기더라고요. 안 그랬으면 또 7, 8년 동안 동익이 형이랑 제주도 산골에 묻혀 있었겠죠. 십몇 년 동안 닫아놓은 그 노란 대문을 요만큼 열어놓는 기분?

실제로 ‘노란 대문’인가요? 조동익의 그 노래 제목처럼.
네. 후진 노란 대문. 얼마 전 밀릭이란 친구가 찾아왔거든요. 꼭 작업 같이 하고 싶다고 “선생님 내려가겠습니다” 하고 제주도에 온 거예요. 그 친구가 밤에 도착했는데, 진짜 너무 어둡고 아무것도 안 보이는 거죠. 나랑 통화하고 대문에 불 딱 켜지는 순간 기분이 너무 이상했대요. 그 얘기를 가사로 썼더라고요. “문을 열고 싶어 노란색 안에, 텅 비었지만 가득 차 있어.” 음반이 두 달 전쯤 나왔어요. 그 친구 음반에서 내가 제일 할머니지, 뭐.


조동익 형도 흐뭇했겠어요.
노래 녹음을 내가 집에서 했으니까요. 서울 스튜디오 가면 어색하고 컨디션도 안 좋아질 수 있어서. 요샌 노래를 컨디션으로 하진 않지만.

2013년 한 인터뷰에서 “노래 실력은 현저히 떨어졌고요. 그 대신 의도하려는 표현은 더 잘되는 것 같아요”라고 말했어요.
새벽도 좋고 아침도 좋아요. 목이 꽉 잠겼는데도 되게 기분 좋으면 그냥 가는 거죠.

어느 때 목소리가 가장 맘에 드세요?
애매하지만 않으면 될 것 같은데요? 굉장히 컨디션이 좋거나, 소리내기도 힘들 때.

자기 상태를 가장 정확히 드러내는 목소리?
그것도 맞아요. 여름에는 더우니까 창문 열어놓고 녹음하는데, 냉장고랑 에어컨은 꺼도 바람 소리랑 벌레 소리는 들어오게 놔둬요.

우리 안에서 마음이 풍성한 공연? 형님이 떠난 것에 대한 슬픔보다 좀 다른 의미로 우리끼리 풀어야만 무대를 끝까지 편안하게 끌고 갈 수 있을 것 같아요. 

장필순 노래에서 가장 극적인 순간은 절정보다 첫 소절, 첫 목소리가 아닌가 생각해요.
목소리가 달라서 그런 것 같아요. 내 노래에 맞는 목소리? 10대, 20대 초반엔 아무도 나한테 가수 하라고 안 했어요. 그러다 주변 오빠들이 “너 노래하면 의외로 멋있겠다”고 격려하면서 시작하게 됐죠. 해바라기 오빠들, 따로 또 같이, 동진이 오빠, 들국화. 내 장점을 먼저 찾아준 거죠.

‘소길’ 두 번째 곡은 어떤 날의 ‘그런 날에는’이었어요. 그런 특별한 노래를 다시 부르는 건 어떤 일인가요?
느낌보다 계기가 재미있었어요. 예전부터 너무 부르고 싶었는데, 동익이 형이 그런 거 별로 안 좋아하거든요. 우려먹는 거. 근데 동익 선배도 어느 순간 새롭다는 느낌을 받은 것 같아요. ‘이렇게 한번 해보고 싶다’는 그림이 그려진 거죠. 둘이 얘기하다 ‘그런 날에는’ 해볼까? 하고 시작했어요.

장필순의 경력 또한 재발견의 역사였죠. 5집과 6집이 특히 그랬고. 요즘은 되레 1, 2집을 포함한 초기작에 대한 수요가 늘었어요.
그래요? 나 전혀 몰랐어.

‘어느새’를 비롯한 김현철, 장기호 같은 작곡가의 도회적인 노래들.
기호 오빠 노래도 멋있죠. ‘그리움에 지친 마음’도 내가 “이런 리듬의 곡 부르고 싶다”고 하니까 만들어준 거예요. 난 운이 참 좋아요. 내가 정성들인 것도 있지만, 음악이 오래가려면 가수랑 작곡가의 의도가 맞아야 하거든요. 나는 막연히 “곡 하나만 줘” 같은 말은 해본 적이 없어요.

8곡이 나온 ‘Rework’ 연작 중 1, 2집 수록 곡은 하나도 없어요. 장필순에게 그 음반들은 어떤 의미인가요?
글쎄요, 지금 들으면 너무 좋죠. 예를 들어 1집의….

‘점점 더’.
지금 그 말 하려고 했는데.(웃음) 동익 오빠한테 얘기했거든요. 그 노래 ‘Rework’ 해볼까? 현철이가 20대 초반에 만든 곡들이 너무 좋아요. 난 지금도 그때 만난 친구들이랑 일해요. 동아기획 시절부터 알고 지내던. 어찌 보면 그 사람들이 지금까지 음악을 한 중요한 동기죠. 그런 게 없었다면 단호하게 그만둘 수 있는 성격이거든요. 3집은 좀 과도기였죠. 그래도 재미있는 기억이 많아요. 메트로놈 없이도 녹음해보고, ‘제비꽃’은 처음 오픈 튜닝으로 기타를 쳐봤고.

방금 리허설 무대에서 조동진의 ‘제비꽃’을 불렀어요. 맘이 좀….
아직은 실감이 안 나요. 정리가 안 돼서. 아까 무대 뒤에 나오던 마지막 사진이 형수님이랑 동진 오빠 같이 있는 모습이거든요.

동료들에게 “내일 공연할 때는 뒤에 보지 말자”고 하셨죠.
사진을 보는데 뭔가 확 와 닿는 기분이 들어서요. 저 두 분이 이제 다 안 계시지. 내일 공연은 정말 철저하게 동진이 형 자주 뵙고 묵묵히 열심히 하는 후배들이 무대에 오르는 거예요. 어쩌면 굉장히 초라한 공연이죠. 하지만 우리 안에서는 너무 부자 공연이에요.

‘조동진 사단’에서 조동진의 존재감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요?
장르나 테크닉 같은 것보다는 음악을 대하는 태도? 마음? 그런 부분의 정신적 지주였어요. 노래에 대한 구체적인 평보다 음악 자체에 대한 얘길 많이 하셨고요. 음악을 사랑하는 방법도 좀 다르게 생각하셨던 것 같아요. 꼭 음악을 해야 음악을 사랑하는 건 아니잖아요. 멈춘 상태에서 항상 음악을 듣고 맘이 떠나지 않던 그런 열정이 멋있었어요.

지난해 발표한 〈나무가 되어〉라는 음반처럼 나무 같은 분이 아니었을까, 추측하게 돼요.
지금도 나무 그늘에 있는 기분이에요. 내일 공연할 때도 그런 맘일 것 같고. 더 지나야 ‘선배님이 진짜 돌아가셨구나’라고 느끼지 않을까요.


그럴 때 노래가 남아 있다는 게 위안이 되는 것 같아요.
내일 관건이 어떻게 마지막 곡까지 쿨하게 끝내느냐, 다들 그게 제일 고민이에요.

꼭 쿨해야 할까요?
그게 동진이 형한테 배운 거예요. 노래 안에 너무 내 감정을 이입하기보다, 듣는 사람이 감정을 담을 수 있게 너는 좀 담담해지고 강건해지라고. 이런 무대가 아니면 좋을 텐데. 원래 동진이 형이 무대에 같이 서기로 약속하고 준비한 공연이니까.
동생 조동희 씨가 “내년에도 초가을쯤 이런 자리를 마련해보고 싶다”고 했어요. 내년 가을도 생각 안 하고 있고, 내일 잘해보고 싶어요. 우리 안에서 마음이 풍성한 공연? 형님이 떠난 것에 대한 슬픔보다, 좀 다른 의미로 우리끼리 풀어야만 무대를 끝까지 편안하게 끌고 갈 수 있을 것 같아요.

한 시대가 끝난 걸까요?
그럼요. 동진 오빠 음악의 계보와 정신을 잇는 사람들은 남아 있지만 동진 오빠 같은 사람은 없어요. 정말 철저하게 고독했고, 그 고독을 외로움으로 푸는 게 아니라 혼자도 나쁘지 않은? 오빠의 삶의 방식이 있었죠. 왜, 꼭 우리 항상 그렇잖아요. 같이 하자, 모이자, 어울리자.


그런 분이 굉장한 공동체를 만들어냈다는 게 신기해요.
아이러니한데, 그런 사람들이 많지 않잖아요. 모인 거죠. 결국 혼자일 수밖에 없는 정서의 사람들이 같이 있다 보니 가끔 마찰도 있었지만. 그 안에선 서로 혼자인 걸 되게 존중해줬어요. 근데 결국 길게 오래가지 못했고.

푸른곰팡이란 새 이름으로 이어지고 있잖아요.
하나음악은 조동진 오빠와 동익 오빠, 그리고 거기서 나온 음악이 대중음악 속의 한 역사로 남은 것 같고요. 다음엔 어떤 타이틀로 가든 그 정신을 갖고 가는 것? 그러다 보면 그 안에서 또 다른 하나음악이 만들어지지 않겠어요?

4년 전, “노래할 때 이념 없이 하는 걸 좋아해요. 대신 시대를 읽을 수 있어야 하죠”라고 말했어요. 지금은 어떤 시대일까요?
잔인한 세상. 웬만한 일엔 충격도 안 받고. 한동안 그런 부분에 대해 강하게 얘기했던 것 같아요. 8집 준비하면서는 다시 정적인 음악으로 돌아갔어요. 무감해진 시대에 가장 기본적인 소리를 들려줄 수 있으면 하는 바람. 시끄러운 데 가면, 오히려 정말 조용히 말할 때 귀 기울이게 되잖아요.

Credit

  • 에디터 유지성
  • 포토그래퍼 김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