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렌치코트보다 SF소설

뻔하고 비싼 것 말고, 게걸스럽게 읽을 만한 책 2권

구름 한 점 없이 시퍼런 하늘은 비현실적이다. 정신이 몽롱해지는 환절기 감기까지 앓고 있으면 공상과학소설을 펼칠 몇 가지 조건이 충족된다. 외계 종족이 서울 한복판을 점령하거나 고도로 인간화된 로봇과 정의를 위해 참전하는 상상을 해보자. 위의 조건이라면 쉽게 감응될지도 모를 일. 가을을 위한 트렌치코트는 뻔하고 비싸니까, 언제 어디서든 게걸스럽게 읽을 수 있는 SF 소설 2권을 추천한다.

무안만용가르바니온 배우 김꽃비의 얼굴이 흑백으로 인쇄된 이 책의 표지를 보자. 공상과학소설임을 고려했을 때 왠지 암울한 디스토피아에 대해 말할 것 같다. 잘못 짚었다. 이 책은 과학적 이론과 심오한 공상을 가지고 독자를 본격적으로 웃기는 책이다. 당신이 SF장르를 좀 꿰고 있다면 저자의 날고 기는 패러디에 흠뻑 취할 수 있을 거다. 반면 초행자더라도 ‘이런 골 때리는 생각을 어떻게 해낸 걸까?’라며 해괴한 세계에 발을 들일 수 있을 거다. 이 책은 지구에 침략해온 외계인 황제 이지라니우스 황제에 대한 이야기다. 그는 군사적으로 의미가 없고 인명피해도 없는 곳만 골라서 일주일에 한 번씩 착실하게 공격한다. 서울 종로 한복판에 등장한 삼단합체 괴수 가르바니온이 이 책의 서막을 알린다. 벌써부터 이름이 어렵다고? 이지라니우스가 갈비를 좋아해서 그럴듯하게 지은 이름이니 쫄지 마시길. 전 지구 중에서도 유독 한국만 덮친 이유는 뭘까? 주기적으로 새로운 괴수를 만들어내는 이유는? MSG가 적당히 가미된 음모론도 깔려 있으니, 이 책을 주파하는 건 시간 문제다. 홍지운 지음, 아작, 1만 4800원

머더봇 다이어리 첫 장을 넘기는 순간 당신은 살인 전문 로봇이 된다. 그런데 좀 이상하다. 혈흔이 낭자해야 할 장면에 ‘나’는 무려 3만 5천 시간 동안 영화와 드라마, 책, 연극, 음악이나 즐기다가 깨어난 것이다. 이 책은 한 살인봇이 외계 행성의 과학자로 구성된 탐사대와 우주를 탐험하는 이야기다. 한 가지 중요한 설정은 살인봇은 지배 모듈을 셀프 해킹하여 더는 살인할 의무가 없다는 것이다. 목적을 잃은 살인봇은 인간이나 할법한 존재와 가치에 대해 자문하면서 소설은 더 촘촘하게 흥미로워진다. 초반에 그는 인간을 무시하고 자신의 전지전능함을 뽐내듯 냉소한다. 하지만 탐사대 리더의 인간적 매력에 마음을 뺏기고 만다. 그는 자신에게 입력된 값으로 갈등을 해결하는 게 아니라 드라마와 영화에서 배운 지혜를 활용한다. 인간적으로 성장해갈수록 그는 얼굴을 덮는 두꺼운 헬멧을 고집하는데, 표정을 들키기 싫어서다. 그 속에 숨어 엔터테인먼트 피드를 훑고 밀린 드라마를 보는 일이 그에겐 최고의 휴식인 것이다. 들을수록 방구석에 박혀 있는 ‘내’ 얘기 같지 않나? 슬퍼할 필요 없다. 저자의 의도대로 소설을 제대로 감상한 것이니까. 마샤 웰스 지음, 알마, 1만 3800원

Credit

  • 에디터 백가경
  • 장소 세운상가
닥터플레이보이 7월 2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