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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잔다르크들

곧 3.1절이다. 일제강점기때 누구보다 용감하게 독립을 외쳤던 인물을 모았다.

남자현, 한국민족문화대백과

남자현 1872.12.7~1933.8.22 “만일 너의 생전에 독립을 보지 못하면 너의 자손에게 똑같은 유언을 하여 내가 남긴 돈을 독립축하금으로 바치도록 하라.” 평생을 오로지 조국의 자주독립과 민족의 존영을 위하여 싸우다 옥고로 순국한 남자현 여사의 유언이다. 그는 ‘여자 안중근’이라 불리며 일본 장교 사이토 마코토를 암살하려다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서로군정서 등에서 활약했으며 옥중에 갇혀 생활하다 1933년 8월 죽음을 결심한다. 15일 동안 단식 투쟁을 벌이다 사경에 이르렀다. 독립축하금과 함께 “사람이 죽고 사는 것이 먹는 데 있는 것이 아니고 정신에 있다. 독립은 정신으로 이루어지느니라”라는 유언을 남기고 향년 60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이후 영화 <암살>에서 배우 전지현이 연기했던 용감한 독립운동가의 모습은 남자현을 모티브로 했다. 

“만일 너의 생전에 독립을 보지 못하면 너의 자손에게 똑같은 유언을 하여 내가 남긴 돈을 독립축하금으로 바치도록 하라.”

 

한국의 잔다르크들
윤희순,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윤희순 1860.6.25~1935.8.1 최초 여성 의병장으로 활약했다. 1905년 을사늑약 체결에 분노해 여성들을 모아 ‘안사람 의병대’를 구성했으며 남성 독립군과 마찬가지로 군사 훈련을 받고 탄약제조소를 직접 운영했다. 선생은 전장에 있는 여성, 남성 의병들을 위로하기 위해 8편의 의병가를 만들어서 보급하기도 했다. 의병가 중에는 여성들도 구국 활동에 나서야 한다는 촉구의 내용, 우리나라 의병을 진압하는 관군들을 질책하는 내용, 일본의 앞잡이 노릇을 하는 밀고자들을 힐책하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선생의 최후는 불운했는데, 그를 좇아 항일 운동에 가담했던 아들이 일본 헌병의 혹독한 고문을 받고 집에 돌아오던 중 선생의 품에 안겨 순국했기 때문이다. 이후 11일 후 선생도 아들을 따라 세상을 떠났다.

 “비록 여자라 해도 나라를 구하는 데에는 남녀의 구별이 있을 수 없다”

 

한국의 잔다르크들
안경신, 국가보훈처

안경신 1888.7.22~미상 평안남도 출신의 안경신 선생은 독실한 기독교 가정에서 태어났다. 3.1만세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이후 임시정부의 한 기관인 대한애국부인회에서 활동하면서 평화적인 외교 청원으로는 독립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자각한다. 이후 선생은 동지들과 함께 과감한 폭탄거사에 뛰어들었다. 1920년 임신 7개월의 몸으로 평남도청과 평양경찰서에 폭탄을 던져 여성으로는 처음으로 사형 선고를 받았다.

“나는 일제 침략자를 놀라게 해서 그들을 섬나라로 철수시킬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인가를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그것은 곧 무력적인 응징이다.”

 

한국의 잔다르크들
권기옥, 국가보훈처

권기옥 1901.1.11~1988.4.19 한국 최초의 여성 비행사로 중국군에서 10여 년간 복무하면서 항일운동을 지속했다. 평양 숭의학교 졸업반이었던 1919년 3월 1일, 항일 운동 중 체포되어 3주일 동안 구류됐다. 그는 전국에 흩어진 애국 동지들과의 접선하기 위해 여자전도단을 조직하여 여자전도대장으로서 전국을 순회하며 강연했고 비밀공작을 전개해나갔다. 그러다 일본 경찰에 발각되어 1920년 9월 상하이로 탈출, 이승만과 안창호 등을 만나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활동을 이어나갔다. 광복을 맞은 이후에도 한중문화협회 부회장, 재향군인회 명예 회원, 부인회 고문을 맡았으며 1988년 서울 장충동의 한 낡은 목조건물에서 여생을 마쳤다. 최근 영화 <청연>의 모티브가 됐던 여성비행사 박경원이 ‘최초의 여성 비행사’로 잘못 알려졌으며 이를 통해 박경원은 친일 논란에 휩싸인 바 있다.  

“젊은이들이여 꿈을 가져라. 꿈이 있는 나라는 희망이 있다”

 

한국의 잔다르크들
지복영, 국가보훈처

지복영 1920.4.11~1970 조국 독립에 앞장선 한국의 잔다르크로 불리는 지복영 선생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여군이자 여성 광복군이었다. 그의 아버지는 지청천 장군으로 1913년 일본사관학교 제26기생으로 졸업하고 1919년 3월 1일 만세운동 이후 만주로 망명하였다. 1938년 한국광복진선청년공작대에 참여하면서 항일운동의 최전선에 나섰다. 그는 임시정부 가족들과 피난 중에도 학교를 세워 아이들에게 한글을 가르치기도 했다. 지복영 선생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활동하며 “대시대는 왔다. 한국 여성 동지들아 활약하자”는 글을 통해 여성 광복군 입대를 종용했다. 평소 아버지 지청천 장군으로부터 “너는 대한의 잔 다르크가 돼라”고 들어왔던 터라 최전선으로 가기로 결심했다고 한다.

“이중 삼중의 압박에 눌리어 신음하던 자매들! 어서 빨리 일어나서 이 민족해방 운동의 뜨거운 용로 속으로 뛰어오라. 과거의 비인간적 생활은 여기서 불살라 버리고 앞날의 참된 삶을 맞이하자.”

 

한국의 잔다르크들
오광심,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오광심 1910.3.15~1976.4.7 오광심은 초등학교인 배달학교에서 교편을 잡으면서 항일운동을 시작했다. 이후 1931년 만주 사변으로 정세가 급박하게 바뀌자 교직을 접고 오로지 독립운동에 매진하기 시작했다. 지하연락 활동 중 조선혁명군 참모장이었던 김학규와 부부의 연을 맺으면서 평생 동지를 만나게 된다. 오광심은 광복군의 기관지 <광복>에 기고하며 조국 광복을 위하여 여자도 남자와 평등하게 참여하고 투쟁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아래와 같은 글로 광복군 사업에 적극 참여하는 것이야말로 남녀평등을 이루는 지름길임을 단언하였다. “광복군은 남자의 전유물이 아니오. 우리 여성의 광복군도 되며 우리 여성들이 참가하지 아니하면, 마치 사람으로 말하면 절름발이가 되고 수레로 말하면 외바퀴 수레가 되어 필경은 전진하지 못하고 쓰러지게 됩니다. (중략) 총과 폭탄을 들고 전선에 뛰어나가서 우리 여성의 피가 압록, 두만강 연안에 흘리며 이 선혈 위에 민족의 자유화가 피고 여성의 평등 열매를 맺게 합시다”

“광복군은 남자의 전유물이 아니오. 우리 여성의 광복군도 되며 우리 여성들이 참가하지 아니하면, 마치 사람으로 말하면 절름발이가 되고 수레로 말하면 외바퀴 수레가 되어 필경은 전진하지 못하고 쓰러지게 됩니다.”

Credit

  • 에디터 백가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