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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자수와 야자수의 도시

서울의 여름을 앞두고 발리와 후쿠오카로 향했다. 거기엔 야자수가 있었다.

구름 한 점없는 발리의 야자수

모두에게 평등한 섬, 발리
“빈땅, 빈땅 플리즈.” 그건 마법을 거는 주문과도 같았다. 매일 정오쯤 눈을 뜨면 자석처럼 해변으로 이끌려 나갔다. 숙소를 고르는 기준은 간단했다. 바다에서 가까울 것. 바다와 숙소 사이에 아무것도 없을 것. 좀 짓궂기도 한, 서핑도 가르치고 음료도 팔고 모래밭과 바닷속에서는 못하는 게 없는 ‘비치 보이’들과 안면이 생긴 후로는, 그들과 하이파이브를 나눈 뒤 여유 있게 플라스틱 의자에 앉아 우선 빈땅 맥주 한 병을 시켰다. 2만5천 루피아. 그게 맞는 가격인지는 모르지만, 어쨌든 묻지 않고 주면 묻지 않고 받았다. 영원히 가지 않는 모래시계를 세우듯 맥주병을 모래에 푹 꽂으면 일과가 시작됐다. 세월아 네월아 두세 병 정도 마시면 해가 졌다. 노란색으로 이글대다, 주황색으로 폭발하다, 보라색으로 흩어져, 파란 바다에 묻혔다. “음, 이 정도면 10점 만점에 7점.” “겨우?” 바닷물처럼 짠(하긴, 매일 볼 테니) 채점관, 비치 보이들이 이제는 집에 갈 시간이라며 의자를 빼앗아갔다. 석양을 보러 밀물처럼 몰려온 사람들이 다시 썰물처럼 도시로 빠져나갔다.

그렇다. 발리엔 바다가 있다. 섬이니까. 해변의 모래가 예쁜가? 별로. 한적한가? 그다지. 하지만 이 바다만큼 무작정 온종일 머무른 곳은 없었다. 배고프면 ‘나시짬뿌르’ 덮밥도 사먹고, 내 머리만한 코코넛을 후루룩 마시고, 담배도 맘대로 피우고, 훌쩍 파도 위를 뛰어오르는 서퍼들과 해변을 말처럼 뛰어다니는 개들을 구경하다 석양을 만끽하면 하루가 이내 저물었다. 나는 서울에서 밤을 좋아하는 사람인 것 같았는데, 발리의 밤도 꽤 화려하다는데, 이곳에서만큼은 다른 일상을 보내게 됐다.

스미냑의 멋진 레코드 바 Studio Eksotika

요즘 뜬다는, 혹은 이미 유명한 짱구의 광활한 쌀밭과 곳곳의 젊은 기운, 우붓의 영적 신비로움, 스미냑의 근사한 레코드 바와 비치 클럽, 놀라울만치 아름다운 울루와투의 절벽에서 내려다본 인도양 역시 잊을 수 없으나, 이 북적대는 해변의 기운이야말로 발리를 가장 발리답게 만드는 것이 아닐까? 여기서 태어난 사람들과, 여기 사는 사람들과, 여기에 머무르는 사람들과, 여기를 처음 온 사람들이 꼭 알맞게 섞여 있는 곳. 발리는 ‘Island of Gods’, 신들의 섬이라 불린다. 그 수많은 신들의 면면만큼이나, 제각기 다른 신분과 목적으로 이 섬을 찾은 수많은 사람들이 모두에게 평등한 바다와 석양을 바라보고 있었다. 당신이 힙스터든, 새침데기든, 배낭여행객이든, 비지니스맨이든 아무런 상관이 없는. 그 속에서 나는 무척 편안하고 자연스러울 수 있었다.

매일이 다른 발리 해변의 석양

매일이 맑았고, 구름도 드물어 해를 시계삼아 움직였다. 내가 이렇게 일찍 일어나는 사람이었나? 서울에서는 생전 구경도 못하는 아침도 자주 먹었다. 햇살만큼이나 만조와 간조를 구분할 수 있게 됐고, 파도를 보며 친구들에게 연락했다. 파도를 예측하는 휴대폰 앱이 있지만, 당장 눈으로 보는 것만큼 정확할 리가 없다. “물 들어왔어. 서핑하자, 빨리 나와!” 그러면 친구들이 스쿠터를 타고 쏜살같이 나타났다. 우리는 아무 것도 입지 않아도 이상하지 않았고, 좀 취하면 정신이 번쩍 들도록 풍덩 물에 빠진 뒤 다시 술을 나눠 마셨다. 그러다 해가 지면 엉덩이 툭툭 털고 일어나 헤어졌다. 내일 우리는 여기서 또 만날 거니까. 이렇게 잎이 긴 야자수 아래에서 만나. 굳이 약속은 하지 않은 채로, 내일의 파도와 또 다른 얼굴을 기대하면서. 그 또한 자연스럽게.

낯익은 여름, 후쿠오카
해변에 가까이 가겠어. 온통 그 생각 뿐. 예상치 못한 사건으로 급히 귀국하게 된 발리 여행 직후, 나는 다시 후쿠오카로 떠났다. 발리는 일곱 시간, 후쿠오카는 한 시간. 딱 그 차이만큼이나 가볍다는 느낌으로 공항에 도착했다. 여기서 바다는 얼마나 걸릴까. 시내까지 택시로 15분쯤이니까, 30분? 후쿠오카에는 인공 해변이 있다. 이름은 모모치. 여행자들의 ‘셀피 스팟’으로 꼽히기도 한다. 아무렴 어떤가, 바다만 좋다면. 어쨌든 바다는 수평선을 향해 활짝 열려 있고, 주변을 다 이겨낼 만한 유일한 힘이 있는 곳이니까.

바위 상부를 금술로 연결한 ‘부부 바위’

이름이 맘에 들어 예약한 시사이드(Seaside) 호텔. 방에서는 바다와 배와 섬이 한꺼번에 보였다. 프런트부터 영어 한마디 통하지 않는(아예 의사소통의 의지가 없는) 다소간의 뻔뻔함에 당황했지만, ‘로컬리티’의 일환으로 받아들이기로 했다. 인공해변이라면 가본 적이 있다. 싱가포르의 센토사. 지난 북미정상회담이 벌어진 바로 그곳이다. 여기는 대단한 규모의 인공 해변입니다, 라는 사실을 자랑스레 알리려는듯한 테마파크적 인상을 풍기던 지역. 그것도 나름대로의 의미가 있겠으나, 이곳은 과연 일본. 재해석이든 복각이든 똑같이 혹은 더 잘 해내지 않을 바에 시작도 않는 바로 그 이웃나라다.

하와이에서 퍼왔다는 모래는 ‘모래’라는 단어를 생각했을 때 대번 떠오르는 그 색깔과 입자로 곱게 깔려 있었다. 아이스박스에 담긴 기린과 아사히 맥주, 요즘 유행인 ‘시티팝’의 할아버지쯤 될 느긋한 AOR(Adult Oriented Rock)이 흐르는 매점. 낮이면 거기서 타코야키 같은 걸 먹으며 시간을 때웠다. 번화가인 톈진과 다이묘는 저번에도 많이 가봤으니까. 아마도 잡지 <뽀빠이>의 ‘캘리포니아 라이프스타일’을 동경하는 듯, 5월부터 이미 훌렁 벗어젖힌 새카만 피부의 멋쟁이 아저씨들이 비치베드에 누워 온몸을 지지고 있었다.

이토시마의 후타미가우라 해변

“어디 꼭 가고 싶은 곳 없어?” “음, 이토시마.” <테라스 하우스>를 막 ‘정주행’하고 나서일까, 거기선 꼭 데이트할 때 도쿄를 벗어나 바다가 있는 가마쿠라에 가던데, 딱 그런 여행이 하고 싶었다. 후쿠오카 시내에서 차로 한 시간쯤 달리면 나오는 이토시마라는 도시. 지난 후쿠오카 여행에서 알게 된 지인의 호의로, 차가 없으면 가기 어려운 이토시마의 바다로 향했다. 로컬, 당일치기, 드라이브 같은 말이 떠오르는 곳. 거기에도 아담한 야자수가 있었다. 두 바위가 부부처럼 나란히 붙어 있는(실제 금줄로 연결시켜놓은) 후타미가우라 해변의 ‘부부바위’에서 연인들은 기도를 하고 또 사진을 찍었다. 일본식 하와이안 덮밥집, 후쿠오카의 레게 아티스트이자 일러스트레이터 논체리의 ‘굿즈’를 판매하는 가게, 그 해변 한켠의 작은 상가에서 아는 얼굴을 마주치고 인사를 나누는 사람들.

후쿠오카 로컬 아티스트 논체리의 일러스트가 그려진 티셔츠와 찻잔

그렇게 낯익은 일이 벌어지는 곳을 휴양지라 말할 수 있을까? 아니, 휴양이 꼭 탈출이자 도피여야 한다는 법은 없으니, 이미 알아서 더 좋을 수도 있는 걸까? 우리는 돌아오는 차에서 야마시타 타츠로의 시티팝을 따라 불렀다. 익숙한 멜로디가 있었고, 정다운 친구들이 생겼다. “후쿠오카를 떠날 생각 없어? 도쿄라든가.” 이미 전국구적 인지도로, 지금 서울에서도 그의 작품을 만날 수 있는 친구에게 물었다. “아니, 지금은 SNS가 있잖아. 내 친구들은 여기에 있고.” 그렇게 불과 서울로부터 한 시간 떨어진, 좋아하는 풍경이 있는 도시에 새로운 친구를 남겨두는 일. 바다를 향해 문을 활짝 열어둔 그곳에.

유지성(Jesse You) | 전 <GQ Korea> 피처 에디터, <PLAYBOY Korea> 부편집장. 주로 음악과 스포츠와 섹스에 대해 쓰고 사람들을 인터뷰했다. 더운 나라를 혼자 여행하는 것을 좋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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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에디터 김민지
  • 포토그래퍼 유지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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닥터플레이보이 7월 2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