웹툰 광고 배너

다신 이딴 식으로 연락 하지 마

받거나 걸었던, 전 남자친구와의 통화 목록.

헤어진 남자친구들에게 전화 오는 횟수가 많을수록 ‘잘해준’ 연애일까? 아니란 걸 알면서도 내심 기다렸던 게 사실이다. 나를 잊지 못한 남자가 보고 싶었고, 영화에서나 볼법한 연인 이후의 친구 사이도 꿈꾼 적 있다. 20대 초반은 전 남자친구들의 전화 때문에 얼굴 들기 부끄러운 짓들로 점철되었다. 고백하건대 그들과의 통화 이후, 대개는 미치도록 후회했다.

첫 번째 통화는 첫사랑 A에게서 걸려왔다. 어린 나이 때부터 유학 생활을 하던 A가 6년 만에 불현듯 연락해온 것이다. 낯선 번호에서 가장 듣고 싶었던 중저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누구세요?”라는 말에 “나야”라고 대답하는 아리송하면서도 떨리는 말투. “잘 지냈어? 나 한국에 왔는데 한번 볼래?” 심장이 이륙하는 비행기 엔진 보다 더 빨리 뛰었던 것 같다. 여전히 다정한 말투에 이별의 순간은 까맣게 잊고 반가운 마음만 앞섰다. ‘첫사랑’은 어떤 경우에서도 불문율의 판타지를 준다는 사실도 그때 깨달았다.

우리는 약속을 정하고 만났다. 학생 때부터 사귀었기 때문에 성인이 돼서 만나는 건 처음이었다. A도 여자친구가 있었고 나도 남자친구가 있었지만 우리는 다시 만나기 위해 이별하겠단 약속까지 해버리고 말았다. 그 말이 맞다. 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 하지만 권선징악도 맞는 말이다. 그렇게 시작한 연애는 오래가지 않아 꽤 처절하게 끝났으니 말이다.

두 번째 통화는 자던 중에 왔다. 쉴새 없이 진동이 와서 깨보니 익숙한 전화번호였다. 받아보니 이미 전남친 B는 만취 상태였다. 왜 그때 헤어졌는지, 내가 진짜 나빴다느니, 주정을 부렸다. 하지만 B는 본래 유머러스한 사람이라 주정이라도 듣다 보면 빠져든다는 게 문제였다. ‘네가 그렇지’, ‘넌 원래 이런 애야’라며 우스꽝스럽게 날 아는 척 하는 모습이 귀여웠다. 한 잔 더하고 싶다는 B의 말에 흔쾌히 집을 나서게 만들 정도였다. 

이별한 후 오랜 뒤에 만나니 인상도 멀끔해지고, 살짝 취해서 대담하기까지 한 B는 좀 매력적이었다. 시간 가는 줄 모르게 술을 마시며 추억팔이를 했다. 취중에 우린 이미 연인이 돼 있었다. 익숙하게 손을 잡았고 습관처럼 숱이 많은 B의 머리카락에 손을 넣고 쓰다듬었다. 그 촉감이 말도 안 되게 변함없었다. 게다가 전남친이라는 ‘익숙함’과 지금의 ‘새로움’이 미묘하게 섞여 호기심을 자극했다.

낯선 남자를 만나는 느낌과는 확연히 다른 기분이었다. 술김에 B가 얼마나 많이 변했는지 침대 위에서도 확인하고 싶어질 때쯤 ‘우리가 다시 연인으로 시작할 수도 있겠다’는 망상까지 해버렸다. 침대 위에서 B는 내가 좋아하는 것을 모조리 기억하고 있다는 듯 자신감이 넘쳤다. ‘너 이런 거 좋아했었잖아’ 하며 스킨십을 시작하는데, 몇 년 전 나의 성감대를 알아내겠다며 ‘열일’하던 B의 모습이 떠올라 코끝이 찡해지기도 했다. 섹스를 하다가도 B는 ‘그때 나한테 왜 그렇게 모질게 굴었냐’며 푸념까지 서슴지 않았으니 말이다.

미안했다. 미안했지만 그런 말 따위 들을 겨를이 없었다. 하지만 다음 날 아침은 좀 달랐다. 술도 깼고 낭만도 찌꺼기처럼 남았다. B는 ‘넌 어떻게 여전하냐’라며 날 비꼬아 얘기했고 침대에서 늦게까지 뒹굴뒹굴하는, 애증의 전남친으로 돌아와 있었다. 신속히 이 상황을 마무리 짓고 싶었다. B는 우물쭈물 내 손을 잡고 버스를 기다려주면서도 서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비로소 전 연인과 쉽게 잠만 자는 전여친, 전남친이 된 순간이었기 때문이다.

이후로 우리는 몇 번을 더 만났다. 물론 취해있을 때만. 친구들과 거나하게 술을 퍼마신 날엔 예외 없이 B에게 전활 걸었다. B는 꼬박꼬박 전화를 받았고, 그때마다 우린 내일을 잊은 채 밤을 보냈다. 하지만 별로 ‘쿨’하지 못했다. 서로의 몸만 원하고 있다는 씁쓸함이 과거의 좋았던 기억까지 좀 먹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최후에는 술에 취한 통화에서 서로의 밑천까지 다 보이며 싸웠다. 치부를 전부 보고 나서야 우리는 전화를 받지 않았고 끝내는 걸지 않게 되었다.  

마지막 통화는 내가 걸었다. 새로운 여자를 만나기 위해 날 걷어찬 전 남친 C에게 말이다. C는 새로운 연인을 만나기 전, 내게 장문의 문자를 보낸 적 있었다. 굉장히 수려하고 긴 문장이었지만 요지는 단순했다. “그동안 고마웠고 이렇게 헤어져서 미안하다, 다음에 다시 연인으로 만날 수 있을까?” 대놓고 어장 만드는 C를 참을 수 없어서 전화를 걸었다. 이별 후유증을 목소리로 한껏 연기하고 있길래 ‘힘들면 돌아와’라고 일단 던져보았다.

역시나 이별 후 재기 중인 역할극에 빠진 C는 우물쭈물 거절했고, 나는 ‘앞으로 잘 살아. 그리고 다신 이딴 식으로 연락 하지 마’라며 전화를 끊었다. 돌이켜보면 내겐 그런 말 할 자격이 없었다. 그때 불현듯 앞으로는 ‘그런 자격’ 있는 사람이 되고 싶어졌다. 마지막 통화를 이후로 전 남친의 통화의 굴레에서 빠져나오기 위해 노력했다. 현재의 연애에 충실하고 과거에 얽매이지 않는 게 멋진 연애의 기본이라는 걸 그제야 배운 거다. 아마도 전 남친에게서 걸려오는 전화는 영원히 받지 않을 계획이다. ‘잘 살고 다신 이딴 식으로 연락 하지 마’라는 말을 누군가에게 멋지고 당당하게 쏘아붙여야 할지도 모르니까 말이다.  

Credit

  • 에디터 백가경
  • 사진제공 One Line Man/Shutterstoc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