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살 예찬

봄날의 맨살을 이길 순 없어.

맨살 예찬

마지막 섹스 칼럼을 쓴 날이 언제였더라. 아무튼 겨울이었다. 체질적으로 스웨터를 도저히 입지 못해서, 겨울이면 맨날 덜덜 떨면서 출퇴근을 했다. 스웨터를 입은 여자에 대해 본격적으로 생각해본 적은 없지만, 몸에 잘 맞는 스웨터를 입은 남자가 어떻게 보이는지쯤은 안다. 그러니까, 겨울의 나는 성적 매력이 별로 없는 사람인지도 모른다. 통계를 내본 적은 없으나, 겨울의 섹스 횟수가 다른 계절에 비해 현저히 적다. 일단 빨리 집에 가고 싶은 맘 반, 스스로 자신 없는 맘 반 정도일까.

겨울의 섹스 칼럼은 대개 실내에서 느린 호흡으로 벌어지는 일을 다룬다. 다소 서정적이다. 처음 만난 여자보단 오래 알던 사이, 낯선 곳보다는 너와 나의 집, 일부러 그렇게 덥혀놓은 건지 술 몇 잔만 마시면 옷을 하나씩 (도합 세 겹쯤 차례차례) 벗어젖히게 되는 술집. 낮보다 밤이 놀라울 정도로 긴 계절. 그리고 그 자체로도 지겹도록 긴 계절. 겨울의 끝은 거의 체념했을 때가 되어야 온다. 그것도 아주 갑작스러운 식이다. 비 한 번 내리고 나서 기온이 20℃까지 치솟는다든가.

사실 별로 서정적이지 않고 성질이 급한 나는 따듯한 양말부터 벗어 던진다. 아, 양말 없는 세상에서 살고 싶다. 드디어 해방. 이제 양말을 넣는 맨 아래 서랍은 (애석하게도) 겨울에 콘돔을 넣어둔 서랍처럼 그다지 열 일이 없다. 그런데 처음엔 좀 우습다. 발등이 이렇게 하얬나? 겨울 동안 햇빛을 쬘 일이 드물었으니. 외출하기 전 옷을 다 입고 나면 거기만 부끄럽다. 복숭아뼈는 귓바퀴만큼이나 묘하게 생긴 데다 만질 때의 감각도 이상하군. 몇 달간 남의 것도, 내 것도 볼 일이 없었으니까(물론 섹스 중에는 주로 알몸이지만 다른 일에 바쁘지 굳이 발등이나 복숭아뼈를 뚫어져라 쳐다보진 않으니). 페티시에 대해서라면 할 말이 많다. 어쩌면 내게 성적 자극을 주는 요소는 제 각각인 수많은 페티시의 총합일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해봤다. 페티시는 학문적 정의와 일상적 용례가 꽤 다르게 사용되는 용어다. 각자의 페티시가 있는 만큼, 개인마다 페티시의 정의도 다를 터. 나의 페티시란, 특정 신체 부위나 옷이나 메이크업이나 소지품(!)을 보는 것만으로도 머리로 피가 팡팡 솟아 상상이 끝까지 다다르고야 마는 어떤 순간이 찾아오게 하는 것.

저 맨살은 어디에서 어떻게 끝날까, 체온이 올라가면 어떻게 달라질까. 우리가 여름이 되면, 좀 더 뜨거워지면 더욱 잘 알 수 있을까. 어쩌면 그게 오늘 밤이 될 수도 있을까.

그러니까, 그것은 내게 순간적이다. 세트 리스트를 달달 외우고 간 콘서트에서의 감정보다 택시 라디오에서 예상하지 못한 선곡에 온 맘을 빼앗기는 것과 비슷하다. 나는 반투명 검정 스타킹을 좋아해, 나는 염색한 단발을 좋아해, 나는 까만 피부를 좋아해…. 페티시다. 하지만 더 주체할 수 없는 건 찰나의 변화에서 온다. 이를테면, 비가 억수같이 오던 날 적당히 취해 2차로 좌식 술집에 들어섰을 때, 아래로 내리는 지퍼가 달린 신발을 벗고 양말마저 벗고 맨발을 드러낸, 그 젖은 발의 여자에게 사랑에 빠지고 만 것 같은 경험.

결국 페티시는 도통 낯선 무언가를 더 가까이서 지켜보고, 그것에 더 가까이 가고 싶은 욕망이다. 나는 스타킹을 신지도 않고, 단발머리를 하지도 않고, 피부가 까맣지도 않아 더욱 궁금한 것이기도 하다. 스타킹으로 뭘 할 수 있을까, 단발머리를 뒤에서 보고 싶다, 까만 피부는…. 하지만 그렇게 ‘반짝’ 등장하는 맨살을 이길 순 없어. 저 맨살은 어디에서 어떻게 끝날까, 체온이 올라가면 어떻게 달라질까. 우리가 여름이 되면, 좀 더 뜨거워지면 더욱 잘 알 수 있을까. 어쩌면 그게 오늘 밤이 될 수도 있을까.

4월, 기다리다 지쳐 나가떨어질 즈음 덜컥 봄이다. 내 새것 같은 복숭아뼈랑 발등도 이상한데, 누군가와 가까이 마주 앉으면 짧게는 4개월, 길게는 6개월 만에 은밀하지만 은밀하지 않은 몸의 어떤 부분이 보인다. 발목이거나, 쇄골이거나, 종아리거나, 목덜미거나. 아무렇지 않으면서 아무렇지 않지 않은 신체 부위들. 여기는 당당한 과시와 몹쓸 관음의 장인 한여름 해수욕장이나 수영장이 아니니까. 하지만 비키니 수영복 같은 건 페티시의 리스트에 없다. 그 풍경이라면 가기 전부터 이미 예측할 수 있다. 그보단 하루 새 머플러와 장갑을 벗어 던지고, 건조함에 몸서리치다 충동적으로 머리 모양을 바꾸고, 무채색 양말과 스타킹을 처박아놓는 도시의 계절과 만남에 몸과 맘이 잔뜩 동한다. 겨우내 꽁꽁 닫혔던 땀샘이 벌컥 열리듯.

몇 주 전 주말 낮, SNS에 처음 맨발로 외출한 날의 하반신 사진을 찍어 올렸다. 해놓고 보니 작년에도 똑같이 그렇게 했다. 그런 내 모습이 섹시할 거라 여긴 건 아니지만, 가볍고 짧은 옷을 입고 문밖을 나서는 순간부터 스스로 완전히 다른 기분이었음을 부정할 순 없다. 꼭 페티시 때문인 건 아니다. 다만 맨살로 세상에 나서는 기분이, 맨살로 공기를 대하고 맨살을 드러내는 기분이 다르다는 것만큼은 확실하다. 새로운 사람을 만나러 간다.

Credit

  • 에디터 양보연
  • 유지성
  • 사진제공 Bluskystudio/Shutterstock
닥터플레이보이 7월 2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