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먼저였을까

그해 4월의 원 나잇 스탠드는 갑자기 포근해진 봄날의 열기 탓이었다.

누가 먼저였을까

처음 만난 사이였다. 충동적인 원 나잇 스탠드였다. ‘업무 파트너와는 자지 않는다’는 원칙은 없지만, 그렇다고 처음 만난 비즈니스 파트너와 원 나잇 스탠드라니! 다음 날 아침, ‘내가 미쳤지’ 하며 베개에 머리를 박았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모든 것이 갑자기 따뜻해진 4월의 날씨 때문이었다. 하필이면 그날 날씨가 포근했고, 그는 재킷을 벗어 손에 들고 가벼운 셔츠 차림으로 나타났으며, 하필이면 셔츠 사이로 그의 단련된 복근이 비쳤다. 어머, 그렇게 선명한 식스팩을 본 것은 처음이었다. 나도 모르게 ‘저 복근, 한번 만져보고 싶다’고 생각했을 뿐인데, 몇 시간의 맥주 미팅 이후 취기에 필름이 끊겼고, 정신을 차렸을 땐 그와 함께 침대에 누워 있었다. 그의 알몸은 취기가 완전히 깬 상태에서도 보기 좋았다. 나도 모르게 그의 식스팩에 다시 손을 얹어보았다. 복근은 단단했고, 내 손기척에 잠에서 깬 그의 페니스도 단단해졌다.

그 밤, 누가 먼저 ‘호텔로 가자’고 하트 시그널을 보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친구 A가 물었다. ”정말 하나도 기억이 안 나?” 나는 답했다. “술 마시는 중에 그가 반복적으로 하이파이브를 하며 내 손을 은근슬쩍 잡은 건 기억나는데, 그 이후로는 필름이 끊겼어. 근데 그 술집에서 내가 그 남자 셔츠 속에 손을 집어넣었을지도 몰라. 내가 그의 셔츠에 손을 넣는 장면은 머릿속에 없는데, 내가 그런 욕망을 가졌다는 게 뚜렷이 기억나거든.” A는 내 말에 박장대소하며 단언했다. “넣었네, 넣었어. 술 다 깬 지금 그 정도로 기억하면 그건 99% 손을 넣은 거다.”

그날, 그 남자의 셔츠 속으로 보인 건 식스팩만이 아니었다. 셔츠 안에는 뽀얗고 매끄러운 윤기가 넘치는 그의 속살이 있었다. 나는 스스로의 남자 취향에 대해 두 가지의 새로운 사실을 깨달았다.한 가지는 내가 ‘뽀얀 피부’를 좋아한다는 것이다. 혹자는 ‘샌님 같아 싫어’라고 비웃을지 몰라도, 나에게 그 남자의 뽀얀 피부는 섹시함을 노골적으로 어필하는 구릿빛 피부와 다른, 새침한 매력이 있었다. 생전 처음으로 ‘여자의 뽀얀 피부에 괜스레 가슴 설레는 남자 마음이 이런 거구나’라고 공감했을 정도니까. 스스로에 대해 깨달은 나머지 한 가지는, 나는 생각보다 시각적 자극에 약하고, 몸 좋은 남자를 탐한다는 거였다. 단지 식스팩이 근사하다는 이유로 남자에게 성욕을 느낄 줄은 정말 꿈에도 몰랐다.

하지만 그 밤, 예기치 않은 봄바람에 나 역시 그에게 내 몸의 일부를 끊임없이 노출하고 있었다. 그 역시 나처럼 우연히 엿보게 된 여자의 속살에 성욕을 느꼈을지 모른다.

재미있는 점은, 4월의 해프닝을 겪은 것이 나만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내 해프닝을 비웃은 A도 내 욕망만큼은 이해했다. “가벼운 셔츠 차림의 남자가 좀 섹시하긴 하지. 나는 셔츠 버튼을 목까지 다 채운 남자가 영 답답해 보이거든. 그런데 날이 따뜻해지면 버튼을 두세 개 열고 자연스럽게 목을 드러내잖아. 소매를 약간 걷었을 때 팔에 힘줄이 보이면 막 흥분되고 말이야. 무엇보다 옷차림이 가벼우면 옷을 빨리 벗을 수 있잖아. 호텔 룸의 문이 채 닫히기도 전에 서둘러 셔츠와 팬츠를 벗어 던지고 내 몸을 탐하는 남자와의 밤은 너무 자극적이야. 재킷 벗고, 셔츠 벗고, 터틀넥까지 벗어야 할 때는 왜 이렇게 길게 느껴지니?” 그 마음, 나도 안다. 섹스 스캔들에 관한 한 모든 경우의 수가 나보다 한 수 위인 B는 한 술 더 떴다. “난 반바지 입은 남자의 허벅지를 볼 때 갑자기 성욕이 느껴질 때가 있어. 반바지 입고 의자에 앉으면 무릎 위로 허벅지가 살짝 보이잖아. 거길 보면 남자의 허벅지 근육이 어떻게 생겼을지 상상하게 되거든. 그 상상과 동시에 내 하반신이 뻐근해지는 걸 느껴. 반바지 속으로 내 발을 집어넣고 싶다니까!” 봄날의 옷차림과 의도하지 않은 남자의 노출에 성욕을 느끼는 건 나만이 아니었던 것이다.

4월의 그 밤에 정말 내가 불쑥 그의 셔츠 안으로 손을 집어넣은 걸까? 여전히 기억나지 않는다. 어쩌면 그가 먼저 내 블라우스 속으로 손을 집어넣었을지도 모른다. 그날 나도 재킷 안에 얇은 실크 블라우스를 입었고, 취기와 열기가 오르면서 재킷을 벗었으니까. 몸 위를 흐르는 실크 블라우스에 블랙 브래지어가 비쳤을 것이고, 셔츠 칼라 사이로 스스로 유일하게 인정하는 섹시 포인트인 쇄골이 보였을 것이다. 어쩌면 내가 그의 복근을 발견해낸 것처럼, 그 역시 내 셔츠의 버튼 사이로 내 가슴을 엿보았을지 모른다. 가끔은 술의 열기에 취해 긴 머리카락을 올려 묶으며 목덜미를 드러내기도 했다. 그날 발목이 보이는 데님 팬츠를 입은 것도 기억난다. 손목과 발목이 몸에 비해 얇은 나는 체형 커버를 위해 되도록 발목을 드러내는 패션을 선택한다. 남자의 시선을 의식한 옷차림은 아니었다. 유혹하기 위해서는 더더욱 아니고. 그날 그 옷차림을 선택한 것은 그저 내가 캐주얼하면서도 섹시함을 잃지 않는 스타일을 선호해서였다. 하지만 그 밤, 예기치 않은 봄바람에 나 역시 그에게 내 몸의 일부를 끊임없이 노출하고 있었다. 그 역시 나처럼 우연히 엿보게 된 여자의 속살에 성욕을 느꼈을지 모른다. 그것이 4월의 해프닝을 만든 것은 아닐까. 아니면 이런 상상조차 비즈니스 파트너와의 첫 미팅에서 내가 주책맞은 성욕을 절제하지 못하고 그의 몸에 손을 대지 않았기를 바라는 간절한 마음에서 시작된 망상일까.

박훈희 | 박훈희는 편하게 읽을 수 있는 섹스 칼럼을 쓴다. 다양한 매체에 기고하고 있으며, 섹스 지침서 <어땠어, 좋았어?>를 출간했다.

Credit

  • 에디터 양보연
  • 일러스트 이승범
  • 박훈희
닥터플레이보이 7월 2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