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터트렌드 7월 2

한가위(에 하는) 키스, 그리고…

추석만 되면 떠오르는 메딕닮은 '누나'

한가위. 이 얼마나 좋은 민족의 명절인가? 가족이 모여 송편도 빚고, 할머니 할아버지도 만나는 연휴. 생각만 해도 가슴이 따뜻함으로 꽉꽉 채워진다. 대학은 들어갔는지, 장가는 언제 가는지, 취업은 했는지, 연봉은 얼마나 늘었는지 등 남 걱정 많은 죽빵 한 대 시원하게 갈기고 싶은 사람 빼곤 이날은 누굴 봐도 다 반갑기 마련. 하지만 난 이런 이유로 한가위를 기다리지 않았다. 부모님과 함께 사는 나에게 한가위는 일 년에 한 번 찾아오는 인디펜던스 데이, 내 심장이 말초신경과 하나 되어 꿈틀대는 젊음의 토네이도였다. 내 가족은 명절 때마다 할머니가 계신 파주로 갔다. 고향에 모이는 동창과 한 그릇 시원하게 하고 싶으신 어머니와 아버지 때문에 한가위 당일보다 며칠 앞서 파주에 가곤 했다. 그럴 때마다 나는 그 시간이 너무 지루했다. 성인이 되고 나선 차례 지내는 당일에 따로 출발했다.

쇼타임이다. 효자 노릇 하던 얌전한 내 모습은 사라지고, 내 안에 야성이 살아나는 오직 나를 위한 날. 음악으로 치자면 평상시 얌전한 음악이 주를 이루던 ‘몬도 그로소’가 자신의 본명인 ‘신이치 오사와’의 이름으로 앨범을 내면 전혀 다른 야성의 EDM을 선보이는 그런 느낌. 일 년에 한번 내가 ‘신이치 오사와’가 되는 그 날. 그게 바로 ‘한가위’였다. 고등학생 때 난 미술학원에 다녔다. 함께 다니는 친구끼리 ‘메딕’이라는 별명을 붙인 한 살 위 누나가 있었다(테란의 메딕을 닮아서). 옥상에서 담배 피울 때마다 살짝 마주치는 메딕 누나. 메딕은 하얀 피부에 똑 단발, 170cm 정도 되는 큰 키라 학원에서 늘 튀었다. 딱 붙는 리바이스 엔지니어드 스커트, 라코스테 PK티 차림에 미술 학원 앞치마를 늘 하고 다녔다. 나와 내 친구들은 시끄럽게 놀다가도 옥상에 메딕만 오면 꿀 먹은 벙어리가 되곤 했다. 스무 살이 되고, 난 대학에 들어갔다. 한가위 연휴였다. 이미 부모님은 파주로 떠나셨고, 나는 라페스타 먹자골목(당시는 등갈비 골목)으로 떠났다. 미술학원 같이 다니던 여자인 친구가 날 불러낸 자리였고, 그 친구는 소개해줄 사람이 있으니 멋있게 나오라고 당부했다. 버버리 카메 바람막이를 입고, 클릭비 김상혁 루이비통 자물쇠 목걸이를 차고, 아이팟 나노 2세대에 있는 신이치 오사와의 음악을 들으며 노란색 100번 버스에 올라탔다.새벽 6시까지 하는 닭볶음탕 집에 갔다. 내 여자인 친구 옆에 메딕이 있었다. 메딕.

찌질한 빡빡이 학생이었던 나를 설레게 했던 그녀. 메딕이 그 ‘소개해줄’ 사람이었던 거다. 내 여자인 친구에겐 미안하지만, 나는 걔가 하는 말이 들리지 않았다. 오직 메딕의 목소리만 내 귀를 때려 박았다. 난 그 순간 질럿과 일대일 맞다이 떠도 두려울 것이 없는 ‘마린’이었다. 메딕과 함께라면 난 두려울 것이 없었다. 메딕누나의 노련한 리드에 자연스럽게 난 목구멍에 술을 들이부었다. 살짝 취해있을 때 메딕은 잠시 화장실을 간다며 자리를 비웠고, 여자인 친구는 이미 상황을 눈치챘고, 메딕도 날 마음에 들어 하는 것 같으니 자신은 빠지겠다며 먼저 자리를 떴다. 여자인 친구는 그 순간 내게 의리의 아이콘 ‘관우’였다. 난 자리를 그녀의 옆으로 옮기고, 밀착했다. 그녀는 내 자물쇠 목걸이가 예쁘다며 만지작거렸다. 내 코가 그녀의 알코올 냄새를 인지할 정도로 가까웠다. 입술이 닿기 직전이었다. 아니 닿았다. 당황하지 않은 척 난 쿨하게 메딕에게 “한번 차볼래?”라며 목걸이를 걸어주며 우리 집이 비었으니 집에서 맥주 한잔 더하자고 제안하고, 메딕은 그 제안을 받아들였다.

새벽 5시쯤, 큰 보름달과 해는 동시에 떠 있었다. 편의점에서 대충 맥주 네 캔과 버터구이 오징어를 하나 사고 집에 들어갔다. 메딕은 부끄러워하는 날 오히려 이끌어줬고, 물 흘러가듯이 밤을 함께 보냈다. 그제야 우린 연락처를 교환했다. 내 모토로라 레이저에 그녀의 번호를 하나하나 누르는 순간 기분이 이상했다. 메딕을 집에 데려다주고 경의선을 타기 위해 역으로 향했다. 역에는 한복을 곱게 차려입은 꼬마들이 보였다. 왠지 모르게 풍성하고, 따뜻했지만 불안했다. 아… 자물쇠 목걸이… 엄마 꺼 가방에서 몰래 자물쇠만 빼서 만든 거였다. 그 사실을 알아차리고 바로 그녀에게 연락해 “돌려받지 않으면 엄마한테 처맞는다”고 이야기했다. 그녀는 환하게 웃어줬다. 나의 그런 지질한 모습마저 귀엽게 봐줬다. 지금은 잘살고 있을까? 메딕…

Credit

  • 에디터 윤신영
  • 일러스트 백가경
  • 아트워크 Anna Ismagilova
닥터플레이보이 7월 2차